Home Prayer_contemplation 차 신부님의 사순절 묵상집 – 사순 제4주간 토요일(4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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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눈은 답을 알고 있다.


      인식론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다보면 본질에 대한 질문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곤란한 질문인 동시에 꼭 거쳐야 하는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매일 그 시간이 되면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어떻게 네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어떻게 네가 말한 것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말장난 같은 이야기지만 이런 미칠 것 같은 수업을 통하여 나중에 신학 공부를 위한 중요한 단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을 둘러싼 군중의 무리들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점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예수님을 보는 사람들에 따라서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열망을 채워줄 분으로, 하느님의 변호사로,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엘리야로, 종교적 권위를 갖고 있는 유명한 분으로, 자신들의 구역을 빼앗으려는 분으로, 혹은 지나가버리거나 죽기를 바랐던 모습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떤 누구의 생각이 이분에 대한 올바른 생각이었는가?

      휴가를 가거나 여행을 가서 산 위나 바닷가에 숙소를 잡고 잠들었다가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통해 비춰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때의 소감은 어떠했는가? 그저 매일 맞이하는 일상의 아침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 것이다. 꿈틀거리면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빛의 파장으로 황금빛 혹은 붉은 빛 물결을 보았을 수도 있다. 새롭고 신선하며 아름답다 못해 장관을 이루는 창조의 첫날과 같은 감격이 있었을 수도 있다. 바로 그 아침이 세상이 창조되거나 변화하는 모습처럼 보여졌을 것이다. 물론 어제와 다른 것은 하나도 없지만 분명히 무엇인가 다른 것을 체험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나’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무엇인가의 변화를 통하여 세상이 그렇게 보여진 것이다. 혹은 비춰진 세상의 모습을 통하여 내 안의 무엇인가가 응답하게 된 것이다. 단순한 로맨틱한 장면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고 체험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볼 산의 거룩한 변모의 사진을 살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들의 경험을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든 다른 무엇으로 고백하든 그분을 보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웃을 그리스도로 볼 수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그들을 보고 있다. 그러나 그런 모든 변화의 모습과 체험을 집안의 장식으로 걸어 놓을 수는 없다. 그것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내 안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내 눈에 비춰지는 것이며, 응시함으로써 나에게 다가온 답이 된다. 결국 우리는 변화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모습을 응시할 수 있어야겠다.



      (기도)

      주 예수님, 우리 자신 안에 사로잡히지 않고 지상의 모든 것을 통하여 당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당신의 모습을 고백하기에 앞서 당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저는 어둠 속에 쉽게 빠져 버리기에 모든 것의 왕으로 오신 당신께서 이곳에 우리와 함께 계심을 제대로 볼 수 없나이다. 매일의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새롭게 체험하고,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의 답을 발견하게 인도해주소서. 저는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보기를 바라나이다.


      “이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하고,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요한 7,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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