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Prayer_contemplation 차 신부님의 사순절 묵상집 – 사순 제2주간 토요일(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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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용서하시는 아버지


      누구나 자신의 아이들이 건강하고 공부 잘하고 출세하기를 바란다. 더구나 영재교육이나 그 밖의 특수한 교육 환경에 맞도록 사교육에도 노력을 기울인지 오래다. 그래서 학교에 진학하기 전에 있는 어린아이들이 배움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놀이와 탐구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부단한 정성을 쏟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아이들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터득 하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참을성 없이 흔들리는 것은 오히려 부모의 비교와 판단이라는 것을 되돌아본다.

      어쨌거나 세상의 부모가 자신의 자녀들에게 쏟는 사랑과 정성은 더 말한 필요가 없다. 그런데 여러 가지 고뇌와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의 비유는 참으로 유익한 선물이 될 것이다. 너무나 친숙해서 그 내용을 거의 암기할 정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양식과 사순 시기에 어울리는 준비를 해보는 시간이 되어야겠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 정도로 제목을 갖고 있는 오늘의 이야기는 독자들인 우리들에게 각자의 입장에 맞는 제목을 붙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미 우리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로 익숙해져 있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두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다. 물론 두 아들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 삶의 모습이 반영될 수 있고 충분한 묵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아들의 모습 속에서는 간단한 오해와 상심 그리고 회개와 불평이 자리할 뿐이다. 오히려 그 두 아들의 아버지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용서와 사랑으로 병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깊이 묵상해야 하는 것이다. 그 아버지는 우리의 하느님이다.

      아버지의 결정적인 모습들은 성경의 상황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어린 아들은 자신의 준비한 말을 아버지에게 말씀드린다. 그것이 어떤 진실하고 순수한 것인지 아닌지 그것은 관심 밖의 일이다. 아버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아버지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살아왔기에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위해 파티를 계획하고 시작한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 아들을 찾지 않은 이유는 집에도 또 다른 아들과 식솔들 그리고 언제든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푯대의 역할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기다리며 찾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작은 아들의 돌아오는 장면에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삶이 얼마나 삐뚤어지고, 불평과 오해와 이기심으로 가득 찼는지를 고백하면서 다시 아버지께 돌아오게 될 때 아버지께서 하루, 한 주, 한 달 혹은 몇 년을 두고 기다리며 지켜봐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공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서 벗어나 굶어죽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가두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스런 포옹과 입맞춤으로, 신뢰와 믿음으로 주님의 계명 안에서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배려다. 그러기에 사랑과 용서의 삶은 아버지에게서 흘러나오는 끝없는 에너지가 된다.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제가 언제나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불쌍한 저를 결코 잊지 않으시고 사랑의 포옹과 입맞춤을 해주시는 당신께 진정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세상 모든 이들의 회개와 당신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고 살아가는 참된 자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제가 흔들릴 때마다 당신께서 저를 안아주시고 입 맞춰 주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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