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Prayer_contemplation 차 신부님의 사순절 묵상집 – 사순 제1주간 금요일(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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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두려움에서 거룩함으로


      다른 때에도 충분하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이겠지만 사순시기를 보내는 우리들은 스스로에게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하기에 적절한 순간임을 깨닫는다.

      본당 신자분들의 가정이나 사업장 방문을 할 때가 있다. 직접 방문을 해봐야 어디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도 알게 되지만 그보다 더욱 큰 느낌을 갖고 돌아올 때가 있다. 그것은 이렇게 먼 곳에서 매 주일마다 성당에 오시는구나 하는 것이다. 물론 그분들은 “자주 다니다보니 짧게 느껴집니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라는 것은 절대적인 결론이다. 그럼에도 주님을 찾는 모든 신자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주님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따르고 믿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용서와 사랑과 회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전달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오히려 우리의 모습 가운데 그 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조심해야 한다. 자주 듣게 되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어떻게 신앙인이 저럴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신앙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성숙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주 쉽게 신앙까지 덤으로 팔아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일까? 용서라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안다고 하면서, 정말로 그것을 원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모습은 왜 자주 보이는 것일까? 오히려 그렇게 말하면서 심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욱 악취가 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의로움에 대해서 얼마나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 의로움에 대해서는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도 궁금해진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평화와 사랑과 일치를 추구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쟁과 시기와 폭력과 강탈을 일삼는가?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이웃에게 내가 어떻게 대하고 살아가는지를 살펴보면 그 답은 차츰 드러날 것이다. 의로움을 이야기하지만 한결같은 삶으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의로움은 때로는 지혜 혹은 사려 깊은 신중함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유다 그리스도인들의 경전에서는 의로움은 ‘신을 공경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완벽하다는 것을 배제하고 우리의 모든 결과들 속에 하느님의 법이 살아있다는 봉헌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진 예수님의 뜻을 새기는 것이다. 예수님 친히 모세의 율법과 십계명을 마음으로부터 간직하셨고 그것을 보여주신 분이시다. 우리의 혀로 찬미가 아닌 칼날이 되어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산상수훈의 가르침에서 배워보자. 의를 선택하는 이들은 살게 될 것이라는 에제키엘의 예언이 오늘 새겨지기를 바라면서….



      (기도)

      주님,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과 법이 무엇인지 늘 깨닫고 살아가게 하소서.

      주님, 나 혼자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내가 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더욱 더 생명을 지향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서로를 죽이는 혀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야고보의 말씀으로 오늘을 살아가게 하소서. “아주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수풀을 태워 버리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혀도 불입니다. 또 불의의 세계입니다.”(야고 3.5-6)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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