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Prayer_contemplation 차 신부님의 대림절 묵상집 -대림 제3주간 토요일(1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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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명을 정할 때 무엇을 정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예전에는 잊어버리지 말라고 생월에 맞춰서 지냈다면 지금은 자료들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정하기 어려워하기는 마찬가지다. 사실 누군가의 이름을 정한다는 것은 그것에 운명 아닌 운명을 정해주는 것 같아서 쉽지 않다. 그러기에 창세기에 아담이 하느님께서 협력자로 만들어주신 것들에게 이름을 정해주었다는 대목은 참으로 경이롭다.

      성경에 나타난 이름은 속기사의 손을 빌리듯 이름 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모든 이름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이름들이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우리 정의의 주님”이라고 불릴 다윗 왕가의 혈통으로부터 이어진 “의로운 가지”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이 정의로움은 권위 있는 정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특징짓고 있다. 시편 72편에서도 “하느님, 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 당신의 정의를 왕자에게 베푸소서. 그가 당신의 백성을 정의로,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통치하게 하소서.”(1-2)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약한 이와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줍니다.”(13)라고 연이어 노래한다.

      복음에서도 예수와 임마누엘이라는 왕족 메시아의 이름을 듣게 된다. 전자는 ‘그는 그들의 백성을 죄에서 구해낼 것이다.’는 뜻이고, 후자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들의 역사를 통해서 늘 위험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기에 그들은 구원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물론 그 기대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보이지만 예레미야는 노예생활에서 재건의 희망을, 마태오 복음에서는 로마의 지배에서 메시아의 희망이 주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소식들은 끊임없는 재난과 충돌과 범죄와 약물과 전쟁과 증오와 자연 재해 들이다. 이 세상은 구세주를 여전히 요구하는 것이다. 어디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 계신지 요청하는 순간이 되었다. 이 순간 주님의 이름에 굳은 희망을 두고 주님의 법을 따라나서도록 합시다.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제가 절망 속에 있을 때 용기를 주소서. 저의 희망을 높게 하시고 제가 당신을 참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내가 당신을 부를 때 항상 곁에 계심을 믿고 의지하게 하소서. 아멘.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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