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주님 수난 성지 주일(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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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이사 50,4-7 필리 2,6-11 루카 22,14-23,56

       

      (행렬 강론)

      재와 종려나무 잎, 나뭇잎과 숯 검댕이, 이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흔하고 구하기 쉬운 것들이다. 이런 가지와 잎을 들고서 유다인의 왕이며 다윗의 아들로 예수님을 맞아들인다. 이제 자신들의 뜻을 이루어질 메시아가 왔다고 외쳐댄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자신들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외쳐댄다. 이 얼마나 대조적인가!

      사실 해마다 사순 시기에 우리는 더 잘해보려고 보다 놓은 희망과 계획을 갖는다. 그리고 예수님을 우리 삶의 왕으로 선포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매일 세속의 것에 연결되어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충만하지 않은 바람들과 우리의 죄들과 교만으로 이런 좋은 지향들을 빼앗기곤 한다. 기쁨의 외침은 그 맛과 모습이 변질되어 간다. 종려나무 잎은 시들어 간다. 그러나 이번 주일은 악을 이기신 하느님의 영원한 영광과 죄를 이긴 은총과 죽음을 이긴 생명을 기억하는 날이다. 그러기에 장엄한 주간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희망을 채워야 한다. 오늘 우리는 침묵 가운데 교회를 떠나지만 우리의 마음은 노래할 것이다. 엄숙함은 축제 안으로 들어올 것이며,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은 우리의 과거의 재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일으키는 새로운 종려나무 잎들 속에서 자라날 것이다. 이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환호하며 외치는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미사 강론)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내 생활에서 변명을 하는 경우는 언제인가? 아마도 내가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나 나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닐까? 만약 내가 억울한 대접을 받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닌데도 책임이 나에게 주어진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얼마나 한심스럽고 속상한 일인가? 그런데 이런 일들이 나에게 자주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는가?

      만약 내가 지친 이들에게 말씀으로 격려할 수 있도록 주님으로부터 제자의 혀를 받고, 아침마다 주님의 말씀을 듣도록 내 귀를 일깨워 주신다는 것을 안다면 어떨까?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설 수 있는 힘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어떨까?

      수난하시기 전에 빠스카 음식을 제자들과 나누시기를 바라신 예수님은 영성체 양식의 핵심을 알려주신다. 바로 당신을 우리에게 구원의 표징으로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약속이 얼마나 나약하고 허무한지를 알려주시는 동시에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함께 하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그리고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해주신다. 이것이 주님 수난과 죽음의 핵심이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다. 왜 그들은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의 동조 세력이 되었을까? 그들은 낮아지고 약해지는 것이 싫었다. 로마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다윗의 왕권을 되찾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것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왕국의 분열을 체험하였고,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섬을 알았을 텐데도 왜 그들은 깨닫지 못하는가? 이것 때문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딸들을 위로하신다. 또 다시 죄의 굴레를 뒤집어쓰는 곧 하느님을 버리고 인간의 계명을 따르는 모습을 경계하신다. 전능하신 분의 힘을 알고 있는 분께서 허무하게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죽음을 받아들이신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순명하시는 것이다. 이로써 아버지의 뜻은 완성이 되었고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이름을 높이 올려주셨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죄 없는 분의 죽음을 바라보아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원하지 않는 순간이지만 죽음으로 인한 정화를 묵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수난의 슬픔보다 우리가 바라는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자리 잡기를 바란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대로의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내가 되는 것이다. 이제 한 발 더 앞으로 주님의 뜻으로 나아가는 거룩한 주간을 시작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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