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ission 제1회 선교의 밤 기념 신앙체험수기 당선작 (6) 고미자 자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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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희망의 층계를 오르며                    고 미자

       

      여보세요, “거기가 SS 클리너 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신문에 나온 광고보고  카운터를 구한다기에 전화 드리는데요, 무경험자도
      될까요? “네 오십시요,” “지금요?” “네, 지금오세요,
      “네, 감사 합니다.” 유월, 하늘이 이토록 맑은데 내 가슴속엔 자욱이 안개가 끼고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 질것 같다. 차라리 장대 비 라도 주룩주룩 쏟아져 내렸으면, 저 맑고 푸른 하늘에
      치자 꽃처럼 하얀 구름은 바람에 실려 어디로인지 가고 있구나, 구름은 스스로 갈수 없으니 바람의 힘을
      빌어야 떠나 갈수 있겠지, 나의 삶은 시간의 파도에 밀려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내 삶의 작은 배는 얼기설기한 돛자락뿐인데 운명의 바람은 나를 어느 항구에 내려놓을까?   집에서는 10 마일 정도니까 그리 멀지 않는 거리, 신문을 접고 집을 나서는
      마음은 몹시 착잡해 온다, 세상은 모두가 그대로 인거 같은데 왜 나만이, 나의 삶만이 달라져야 하는지, 경험이 없는데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과는 전혀 분야가
      다른데, 허지만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하늘을
      처다 보고 땅을 응시해도 이렇다 할 만 한
      뾰쪽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니 이 길을 택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는가, 여러
      가지의 생각들이 머릿속을 필름처럼 스쳐가며 이역 생활의 오랜 시간들이 무더운 날의 아지랑이처럼 아롱거린다.

       

      1967 2월 푸른
      꿈을 안은 백의의 천사들 240여명은 루프트한자에 몸을 싣고 20
      시간을 구름 위를 날아 눈발이 희끗 희끗 깔려 있던 낯설고 산 설고 물설며 언어도 설은 독일 땅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파란 눈 노랑머리의 독일 간호사들, 그리고 환자들과 손짓 몸짓으로
      소통하며 그래도  우리 한국 간호사는
      국제 간호협회에 가입 되였다는 자부심으로 당당히 일했던 젊은 시절, 독일 생활 3년 계약이 끝날 무렵 동료와 친구들의 축복 속에 독일의 보흠 랑엔드레아 아름다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두
      아들을 낳아 평범하게 간호사를 하다가 1978 5월 온
      가족이 미국에 이민 왔다. 얼마 후 나는 병원의 수술실에 어렵지 않게 취직이 되었다. 남편은 친구 분의 도움으로 보석 수리를 배워 미국에 온지 1년 후
      가게를 차렸고 그래서 나는 병원 근무가 끝나면 부랴부랴 가게로 와서 남편과 함께 집에 오곤 하다가 병원을 그만두고 남편을 도우며 아이들을 돌보기로
      했다. 도둑들이 밤 낫으로 눈을 번뜩이며 여기를 뚫을까? 저기를
      뚫을까? 하는 금 은 보석상, 자나 깨나 마음이 놓이지 않는
      직업이었다. 남편과 함께 그 가게를 11, 밤에는 도둑이 지붕을 뚫고 또는 뒷문을 부수고 들어오려 하면 비상벨이 울리고,
      어떤 때는 남편과 나 가게를 오가며 밤을 밝히기도 여러 차례, 1985년 성탄절을 이틀
      앞두고 무장 강도 다섯이서 시카고 보석상을 휩쓸고 다녔다. 마지막으로 우리 가게에 세 녀석이 손님으로
      가장하고 들어왔다 그때는 바쁜 때이라 여자 손님도 셋이나 있고 남편 그리고 나, 다섯 사람이나 가게
      안에 있었다. 갑자기 한 녀석이 나의 가슴에 번쩍이는 물체를 들이데드니 아무것도 만지지 말고 움직이지
      말란다. 하도 작은 물체라 나는 장난 인줄알고 웃으며 남편을 처다 보니 그 순간 다른 녀석이 남편의
      가슴에 시커멓고 커다란 총을 들이대며 “돈 터치 에니 씽”하고 훌쩍 쇼 케이스를 뛰어 넘어 옆으로 오며 모두 손을 머리위로 올리고 뒤로 가라고
      한다. 손님과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가게
      뒷방으로 가서 초등학교 시절 벌을 섰던 것처럼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머리위로 올리는데 나의 목에 기다란 새끼줄 목걸이에 성모님 메달이 있는데 벗기려하기에
      내가  벗어 주었다.

      그 일 들은 참으로 순식간에 진행이 되었다. 다른 녀석은 쇼 케이스안의 물건을 삽시간에 챙겨 달아났다. 강도들을
      내 보낸 뒤( 문은 버튼을 눌러 주어야 나갈 수 있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 하니 번쩍번쩍 사이렌을 요란히 울리며 경찰차 몇 대가 줄 줄 히 가게 앞에 늘어선다. 즉시 그곳에서
      방송이 긴급 뉴스로 나갔다. 그러자 우리가게를 털고 질주하던 차가 속도위반으로 잡혔는데 멈추지 않고
      도망가는 것을 추격하여 손을 쳐들게 하고 검색하는데 그 주머니에서 나의 목걸이가 나옴과 동시에 방송이 나와 그 녀석은 바로 잡았지만 진짜 많이
      가지고 달아난 녀석은 금방 나오자마자 누구에게 건넸는지 없다고 했단다. 그날 저녁 우리는 기진맥진 지쳐
      있는데 또 경찰서에 가서 범인 확인을 해야 했다 범인들은 우리들을 볼 수 없지만 특수 유리창을 통해 우리는 그 범인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다시 본다는 것은 소름 끼치는 일 이었다. 지친사람들을 데리고 시간도
      많이 끌며 이것저것 질문이 많았다. 집에 오니 새벽 1시가
      다 되었다.

      다음날 남편은 도매상에 가서 물건을 사와야 장사를 할 수
      있기에 일찍 나가고 나는 혼자서 가게에 가니 손님들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먼저 들어가서
      금고를 열어야 물건을 정리 하는데 손님들이 함께 들어와 기다리니 도저히 금고가 열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손님들을 내보내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양해를 구하고 금고를 열어 있는 물건이라도 정리한 다음에 다시 들어오도록 했다. 그런데 한번 나쁜 일을 당하면 그 후유증은 무서움 이였다 젊은 애들이 문 앞에 서면 먼저 남편을 처다 본다. 문을 열어 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거의 열어주지만 피가 거꾸로 서는 것 같았다. 내 가슴에 그리고
      남편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던 그 악인들! 지금도 그들의 모습은 각인 되어 있다. 그래도 우리는 집에 오면 행복 했다. 우리의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안식처가 있고 두 아들이 있고 일요일은 성당에 나가 지나간 한주간의 삶을 돌아보며 경건히 미사에 참례하고 또 우리에게 모든 역경을 이겨
      낼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라고 두 손과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성전에 가는 것이고 삶의 에너지를 제 충전하며 영혼의 양식을 받아 모시는 날 이기에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날 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벼락이 날 벼락이 떨어지다니, 1990년 여름 남편이 위암말기라는 길어야 6개월 살수 있다는 무서운 사형선고가 나의 심장을 조각냈다. 어째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그는 아직 젊고 아이들이 어린 나이인데
      가정의 주추 돌이 무너진다니 또 나는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혼자서 살아간단 말인가, 내가 무슨 죄를
      졌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하느님 저의 잘못을 모두 용서하시고 저희 가정에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렇게 엄청난 고통을 어떻게 제가 감당합니까? 울며불며
      호소해도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진단 받은 날부터 가게 문은 굳게 닫혀있고 나는 그날부터 남편의
      병상을 지키며 의자에서 구부리고 앉아 밤을 새우고 수술 후  환자가 많이 너무 많이 아파하여 주치 의사를 찾으니 그 의사는 휴가를
      떠나고 없단다.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인술이 상술이 된지는 이미 오래 되었지만 아무런 가능성도 없는 상황에서 여기는 이렇게 지져버리면 되고, 저기는 이렇게 잘라내면 된다고 환자와 가족을 속이고 수술해 놓고 생과 사를 가름하는 이시기에 나 몰라라 팽개쳐
      놓고 휴가를 가다니, 그 의사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지 몰라도 나와 자식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하고 또 소중한 존재요 가정의 주춧돌인데 이럴 수가 있을까? 항암치료 이겨내지 못하고 두 달 만인
      시월에 남편은 이 세상을 떠나갔다. 아이들과 나를 이 넓은 천지에 남기고, 슬픔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뼈를 깎았다. 장례 미사 때 정 윤화
      신부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죽음은 우리가 다른 곳으로 이민을 가는 것에 비유하면 된다고, 미국에 이민 올 때도 미국 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왔지 않느냐고” 그때는 그 말씀이 귓전을 맴돌기만
      했는데 시간의 흐름은 그 말씀을 자주 묵상하게 한다. 장례 몇 일후 그 주치의란 사람한테서 걸려온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소리, “화산이 폭발 하는 것처럼 수술 후에 퍼졌어요.
      이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린지, 생명의 존엄성을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 사람 이였을까? 그 사람도 따뜻한 심장이 있는 사람일까? 남편을 벌판에 남겨두고
      그래도 목숨이 붙어 있다고 살아야 한다고 나는 따뜻한 집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래도 시간은 나를
      위해 멈추어 주지 않았다  나는
      이제 홀로 생활 전선에 뛰어 들어야 했다. 3개월 후 초한 모습으로 가게에 나가 문을 열었다, 내가 너무 걱정되어 큰 아이가 얼마간 도왔지만 학업을 계속 해야 하기 때문에 혼자서 가게를 지켜야했다. 구석구석마다 베여있는 그의 체취, 금방이라도 여보! 하고 웃으며 부를 것만 같은 착각, 가게가 끝나고 집에 오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눈물만 흘렸다, 그래도 시간은 흘렀다 때로는 가까운 이웃의 도움도 받았고, 그러기를 6 1996
      어느 날 오전시간 문을 열고 얼마 안 되는데 젊은 남자 둘이 들어와서 약혼반지를 보여주라기에  반지 사이즈를 재려고 뒤돌아보는 순간 훌쩍 쇼 케이스를 뛰어넘어와 나의어깨를
      뒤로 재끼고 수갑을 채워 나를 책상 밑으로 밀어 넣고 미리서 준비해온 베게니 에다 차곡차곡 진열장과 쇼 윈도우를 깨끗이 털어 뒷문으로 유유히 걸어
      나갔다.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을까?

      수 십 여 년 동안이나 피와 땀과 노력의 대가로 일구어놓은
      남의 재산을 갈취해가는 악인들, 나이도 어린것들이, 나는
      혼자이기 때문에 빼앗김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너무나 무모한 짓 이였지만 그때 나는 세상을
      너무도 모르는 바보였다. 돈 보따리를 들고 도둑에게 가져 가시요, 하며
      길가에 서 있는 것과 무엇이 달랐단 말인가? 나의 목숨만 남겨놓고 나간 다음에야 알람을 누르니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차 들이 왔지만 나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내가 살아서 두 아들 고아 만들지
      않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내가 주춧돌이 되어 아이들의 힘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도 서럽고 원망스러워 자꾸 자꾸 그치지 않고 눈물이
      흘렀다. 성당에서 미사 드릴 때 주기도문에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시고” 하는 대목에서는 눈물은
      멈추지 않고 줄줄 흘러 내렸다. 속마음이 너무도 서러워 흐느끼며 울고 또 울었다. 정말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생활의 터전을 모조리 앗아간 그들을 제가용서
      할 수 있을까요? 하고 울면서 하느님께 물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 그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합당한 대가를 해주시리라고 생각하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흘러간 시간과 망각이라는
      신이주신 선물 때문일까인간의
      뇌는 무궁무진 하다드니 순식간에 리와인딩을 해 몇 천 날 들을 끌어다주었다. 벌써 그 가게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젊은 남자가 주인 같았다.
      나이는 아마 삼십 전후 내 아들 또래나 되었을까?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없었다. 아마도 어디엔가 놓아두고 잊어 버렸나 보다, 아니면 하루 종일 주머니에
      넣고 아애 꺼내지 않을 줄도 모르는 일이다, 직원은 외국인 여자 하나가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며 후론트에서
      일을 하고 뒤쪽 공장에도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가게였다 나는 주인을 쳐다보며 “나는
      컴퓨터를 아직 못하는 데요, 하니까 괜찮아요, 가르쳐 드릴게요, 한다. 그날은 이것저것 둘러보고 내일 아침 8 시에 나오라고 한다. 다음날 이른 아침 샌드위치 한 조각과 콜라
      한 캔을 가방에 넣고 출근했다, 새로운 직장에 낯 설은 곳이라 이것저것 하다 보니 금방 시간이 갔나보다
      점심시간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빵 한 조각이라도 직원들이 오손도손 하며 먹으리라 생각했었다, 모두 각자가 어떻게 해결했는지 알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준비해간 샌드위치와 콜라를 들고 가게 뒤편 주차장으로가 내게 주어진 그 시간을 내 차속에 들어가 앉아 태양열에 구운 빵 한입 베어 물고 눈물 한
      모금 삼키며 왜 그이는 나 혼자 이렇게 남겨두고 갔을까! 내가 아이들하고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라고,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그 종업원을 쫒아 다니며 이것저것 배우다 보니 하루가 참
      빨리 지났다. 다음날 아침 8시 출근을 했다. 한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손님이 오니까 나더러 도와주란다. 한번 이라도 
      나에게 시범을 보여주어야지 무조건 하라면 되는 건가? 나 역시 바보노릇은 하기
      싫었다. 그 당시 나에게 컴퓨터는 여간 두려운 물체였다 내가 사용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래서 주인에게 나는   컴퓨터를 못한다고 했지 않아요! 가르쳐
      주지도 않고 어떻게 손님을 받아요? 하니까 시간이 없었지 않아요, 한다
      그럼 컴퓨터 하는 사람을 채용 하십시오. 하고 바로 그 직장을 나왔다.
      어디로 갈까? 막막하기 그지없는 내 처지였다, 집으로
      와서 신문을 뒤적이며 내놓은 가게를 훌 터 보았다. 잘되면 왜 판다고 신문 광고가 나오랴, 그래도 몇 군대 가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가게가 없었다. 자영업을
      했던 터라 소규모 직장에서는 그 분위기를 소화해내기 힘들 거라는 것을 내 자신이 알고 있었지만 참으로 암담했다.
      다른 사업을 해보고 싶었지만 여자 혼자의 힘으로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동안 지났는데 마침 아는 사람 중에 급히 가게를
      정리하고 한국을 가야 한다고 소개를 해주기에 언니와 함께 갔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도 않을뿐더러 가게에
      들어가니 안에서 보는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 여기 “앉아서 커피마시면 참 좋겠네,” 라고 하여 함께
      갔던 언니와 거기 있는 사람들이 폭소를 했다. 가게 보러 와서 커피 마실 것 부터 생각한다고,   나는 바느질을 못 하는데 어떻게 세탁소를
      하느냐고 언니에게 앙탈을 부리면 언니는 바느질은 내가 가게에 가지고 가서 해다 주마 받아만 놓아라, 절대
      손님한테 못한다는 모습 보이지 말고 당당하게 잘하는 것처럼 행동해라, 언니는 늘 강조했다. 언니는 그때 나의 가게와 10분 내의 거리에서 가발 가게를 운영하고
      계셨다. 엄마 같았던 나의 사랑하는 언니, 가게는 곧 계약이
      성사되었다. 언니가 도와주고 또 현 주인이 일주일을 해주기로 했다. 아침일찍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늦잠 잘까봐 밤중에 몇 번씩 일어나 시계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 일이 조금 익숙해지자
      내가 하루 일했던 곳에 전화해서 하루의 품삯을 보내달라고 주소를 주었다.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기에 왜 안 보내 주느냐고 하니 보냈다고 한다. 그래요, 그럼
      이번 주 까지 기다리지요, 그리고 또 일주일이 지났다. 아직도
      안 온다. 이번에는 나도 화가 났다, 힘없는 여자의 노동력을
      착취 할 수는 없는 일, 세 번째 다시 전화를 했다. 다시
      물어보니 “보냈는데요, 한다. , 십 칠년간 시카고에서 비즈니스 한 사람이다, 이 삼 일이면 우편물
      도착하는 거리인데 당장 보내!”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이틀 후에 생각보다 후하게 수표를 보내 왔었다. 힘없고 불상한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비인간적인 사람들이 없이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평화의 물결이 잔잔히 흐르고 마음과 마음에 가득한 미소 아름다운 세상이 되게,
      세탁소에서 손님옷의 먼지를 털어주며, 내 마음속의 번뇌도 털어내고 그 옷 주인에게 고마운
      파장을 보내며 내 생활 터전에 밑거름인 손님들에게 감사하고, 육신은 부셔져도 맑은 영혼으로 내가 누구인가를
      더듬어보는 소중한 삶의 가치를 저울질 해본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당신이 종사하고 있는 직업을 사랑하고 그것에 만족하라“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의 대부인“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그는 전쟁의 와중에서도 늘 명상하는 분이었다, 내가 지치고 힘들 때 그의 명상록을 보며
      많은 위안을 얻었다, 위의 글은 그의 명상록을 펼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글이다. 그는 또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우주가 생성될 당시부터
      이미 준비된 것” 이라고 “죽음은 출생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신비“이며 ”삶은 여러 원소의 결합이며 죽음은 그 원소 들의흝어짐 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별은 슬픔이요 아픔이다, 가을에 떨어지는 갈잎들도  마지막 울음을 토해내고 바람결에 저희들끼리
      몰려다니며 서러운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는가!

      자기의 생을 다하고 떨어지는 마른 나뭇잎도 울면서 떨어지는
      것을! 사람의 머리카락도 바다의 물방울까지도 헤아려 놓으셨다는 하느님의 하신일, 신께서 하신 일들을 인간이 어찌 알리요, 그 신비의 세계를! 새 들을 보며 그 조그맣고 뾰쪽한 주둥이로 입맞춤하며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환상의 날개를 펴며 퍼덕이는, 모습, 징그러운
      애 벌래 에서 아름다운 날개로 거듭 탈바꿈하는 나비, 그 작은 날개로 종족 보존을 위해 수 천 마일을
      나는 그 신비의 세계! 우주의 티끌인 지구 안에서 생명을 주신 분께 감사드리고 내게 일 할 수 있는
      능력과 건강주심에 감사하고 그분이 창조하신 자연의 아름다움에 나의 영혼을 흠뻑 적시며 자연과 소통 하고 싶다, 호숫가에
      앉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름 모를 새들은 맑고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고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켜 자맥질을 가르치고 있는 백조가족, 오리가족, 호수 위에서는 갈매기들 춤추고  늘 자연의 풍성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짓밟을수록 더욱 파랗게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금잔디처럼, 매서운
      , 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더욱 고운 향기를 지니고 피어나는 여리지만 강인한 들의 꽃이나 길섶의 꽃처럼
      오늘까지 숨을 쉬고 있음을 무한히 자비로우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아픔으로 얼룩이진 시간들을 바람에 실려 멀리 떠나보내고 철따라 자연이 주는 선물에
      깊은 감사를 보내며  12년 동안이나
      혈류 증을 앓던 여인의 병을 “오직 믿음”이 (마태복음 9 22)고침을 받았듯이 오늘도 쉬지 않고 희망으로 가는 층계를 한
      계단 한 계단씩 오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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