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ission 제1회 선교의 밤 기념 신앙체험수기 당선작 (4) 정동학 안드레아 형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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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먼저 저에 대한 신앙 체험의 수기를 쓰는 것에 대해 주님께 영광들 드립니다.

       

      제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받은 계기가된것 죽음을 경험한 후입니다.

      다니던 회사에서 1982년 여름, 직원들을 위해 낙산 해수욕장에 캠프를 개장하여 어머님과 함께 갔었을 때 입니다.

         제가 바닷물에 들어갈 때 어머님께서 얘야 깊은데 들어가지
      말아라라는 말씀에 잔소리라고 투덜대면서 바닷물에 들어가서, 물의
      깊이가 가슴에 다달은 곳에 서서 파도 타기를 하고 있을때, 파도가 점차 세어져서 무서움을 느꼈습니다.  같은 장소에는 나를 포함한 7명중 3명은 육지로 빠져나갔고,
      3
      명은 파도에 휩쓸려 먼 바다 쪽으로 쓸려 나가 죽음을 당했습니다이때 저는 육지로 나갈려고 발버둥 쳤으나 파도가 먼 바다쪽으로 보내는
      힘이 얼마나 센지, 몸이 먼 바다 쪽으로 휩쓸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어느 한순간 발이 모래에 닿아서, 죽을 힘을 다해서
      파도를 헤치고 살아서 육지로 나왔습니다
      후 한달정도 죽음의 공포 생각이 몸을 떨게 하였습니다.

       

      그 후
      어느 일요일, 제가 유아 영세를 한 이후로 다니고 있는 서울 대방동 성당으로 미사 참례를 하기 위해
      성당 대문을 들어설 때, 청년회장이 나에게 다음번 청년회장을
      하지 않겠냐고 권유를 해서 나는 이미 죽음 몸인데 무엇을
      못하랴라는 의지에 하겠다고 응답을 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 까지 소심하고 여린마음의 성격이였지만, 죽음을 경험한 후로 성격의 변화가 오고 있었던 참 이였습니다.

       

      첫번째 신앙체험은 청년회장이 된 후, 여름 봉사할동을 할 때 였습니다.

       

      때는 1983년 여름, 일주일 정도 대방동성당 청년 110명과 음식 봉사만을 전적으로 책임 지실 어머님 13, 보좌신부님, 신학생등 함께 용문산에 있는 음성 결핵환우촌에 산의
      중턱을 계단식으로 깍아 돌로 축대를 쌓아서 뽕나무밭을 만드는 노동 봉사활동을 하였습니다.

      봉사 가기전 2차례의 사전 답사를 한후, 결핵환우들에게 폐가 되지 않고, 그들이 또 봉사활동 왔구나라는 의식을 떨쳐 버리게 하기 위해서, 몇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첫째, 봉사자들은
      화장을 하지 않는다.

      둘째, 봉사자들은
      껌을 씹지 않는다.

      세째, 봉사자들은
      먼저 인사를 한다.

      네째, 봉사자들은
      담배를 피지 않는다.

      등의 봉사 활동 할때의 규칙을 정하고 이를 행하였다.

      아침부터,오후 내내, 50
      노동 10분 휴식을 정하고, 집단 노동을 하면서 땀을 흘리고, 밤에는 성모의밤, 십자가의 길등 기도에 매진하였다.

      처음에는 봉사자들이 먼저 인사를 건냈지만, 3~4일후에
      차차 환우들이 먼저 인사를 해오는 쪽으로 바뀌기 시작 했습니다.

      봉사를 마치고, 모든 환우들, 환우를 볼보는 수녀님들, 음식봉사하는 어머님들, 청년봉사자 110,신학생, 신부님 모두 함께 송별미사를 할때, 환우대표가 뜨겁고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였을때, 모두가 숙연해지고, 눈시울을 적시게
      되었습니다.

      이에 답사를 맡은 봉사자대표가 우리가 무엇을 하였길때
      이러한 기쁨을 주심니까”, “당신이 누구시길때 저희에게 이러한 은총을 주십니까라고 할 때는 한사람 빠짐 없이 모두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저도 함께 소리내어 흐느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저의 몸은
      바닥에서 떨어져 공중에 들림의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봉사활동 다녀온 후에 보좌신부님께서 청년봉사자들의 부모님들로 부터 우리 아이가 예전같지 않고 달라졌다”, “청소를 하지 않던 아이가
      청소도 하고 자세가 달라졌다는등의 말씀들을 듣고, 저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청년들의 믿음도 더욱 굳건해져 몇명은 성직자와 수도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두번째 이야기는 지구차원의 활동 및 아내와의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 드리겠습니다.

       

      같은해 1983년도 서울대교구 제9지구에 있는 11개성당(대방동,영등포,여의도,난곡,사당동,봉천동,봉천1,노량진,상도동,명수대,신림동)의 청년신앙
      쇄신대회를 위해 우리나라

      최초로 교구의 지구차원 청년연합회가 조직이 되었으며, 이때 9지구 청년연합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준비과정을 거쳐, 이 대회가 열릴때, 안동교구의 듀봉주교님, 북한에 다녀오신 최기식신부님도 연사로 모셨고,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바로 잡기 위한 마당놀이, 청년들의
      쇄신을 위한 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각 성당에서 청년들은 행렬을 지어 걸어서 대방동 성당에 모였으며, 모인
      형제자매 청년들은 2,000명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순서로 마당놀이할 때는 정경들도 사복입고 있었다고 들었으나, 모두가 손에 손잡고 노래부르며 쇄신대회를 마쳤습니다.

         저의 아내를
      처음 만났것은 이 신앙쇄신대회 당일 이였습니다.  같은 성당에 다니시는 아주머니께서 중매를 하였으나, 두번이나 시간이 안되어 차일 피일 늦추다가, 세번째 약속을 어머님께서
      하였는데, 하필 신앙쇄신대회 날에 잡아놓은 것입니다.

      다행이 성당 바로 밑에 다방으로 선 볼 장소를 잡았으니 잠시 라도 와서 보라는 어머님 말씀에 청년
      2000명이 모인 성당에서 대회장으로서의 대회를 선언을 하고, 바로
      선을 보는 장소인 다방으로 갔습니다. 가자마자 아내를 데리고 성당으로 같이 와서, 아내를 맨 끝자리에 앉치고, 대회를 치렀으며, 그후 아내를 다시 만난것이 한달반정도 흐른후 입니다.

        이후 몇번의 더 만남후에 여의도의 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서, 누군가의
      힘이 느껴지면서 유미씨만 좋으시면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요라는
      말이 저절로 제가 아내에게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다음해에 결혼을 하게 되었으며, 1984년도
      청년연합회장을 할때 많은 내조를 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1984년도 5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한국천주교 200주년 및 103위 시성식을 위해 방한 하셨을때는 청년들이 모인 장충체육관에 교황님께서 참석을 하셨습니다.

      그 때
      저는 9지구 청년대표로 그리스도 청년으로서 나아길 길에 대한 결의서를 낭독을 하게되었습니다청년회장 1년과 청년연합회장 1년을 마치고,
      어느 신자들 처럼 평범하기 성당에 다녔습니다.

       

      세번째로 13
      동안 해외 생활로 신앙생활에서 멀어진 시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3년 본격적인
      해외 생활 이전에,  2년정도 리비아로
      회사에서 발령이 나서 근무할때 1년반정도 성당에 다니지 못하면서 신앙생활에서 멀어진 첫번째 시기가 되었습니다.

      리비아는 회교국가이지만 순교로 지킨 2개의 성당에 있습니다.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와 제2의 도시 벵가지에 성당에 있는데, 저는 6개월정도는 트리폴리에 있을 때 일요일에 성당에 다닐 수가
      있었습니다. 이때 성가대의 지휘를 맡기도 했지만, 1년반정도는
      실트라는 곳에 가서 근무를 하게되어 성당을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2년 근무후
      한국으로 발령이 나서 돌아 온후 신앙심이 깊지 않고 타성적으로 성당에 다녔습니다. 회사를 옮긴후에 몇년후인
      2000년 미국에 이민을 오게 되었으며 가족만 시카고에 놓고, 회사일로
      본격적인 해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나라, 인도를 비롯한 서남아시아나라, 두바이를
      비롯한 중동지역나라, 이집트와 그 주변 국가인 북아프리카 국가들,터키를
      비롯한 지중해 접한 몇나라, 케냐를 위시한 동아프리카, 나이지리아와
      서아프리카 나라들, 남아공과 마다카스카르등 30여개국중에
      몇나라에서는 장기 거주하였으며, 거주하지 않는 나라에는 출장을 갔습니다.

      마일리지만 100만마일이 족히 될 정도로 출장이 빈번 했습니다.

      성당에 나가는 날은 휴가를 받아, 1년에 두차례 시카고로
      올 때야 겨우 미사에 참여할 정도였습니다.

        이시기에 회교,힌두교,불교등 종교가 다른 여러나라를 돌아 다니면서, 신앙적으로 절제된 생활 보다는 유흥에 빠졌으며, 위성TV, 미디어, 인터넷, 통신,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많은 것을 접하기도 하여 창조론에 의구심을 품었으며, “
      세상은 진화론에서 비롯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도 하기도 하였습니다.

      초능력등도 그리스도인이던 아니던 누구든지 할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하느님이 정말 있는 것인가 의구심도
      품게 되었습니다.

       

      케냐에 거주하고 있을 때, 다니던 회사가 다른 회사에 팔리게
      되면서, 케냐에서 지속적으로 거주를 하고 싶어서, 처음 접하는
      참깨 재배사업을 2년동안 하였으나, 심한 가뭄과 재배농민들의
      기술,장비등의 부족으로 실패를 하였습니다.

      그후 케냐에서 개인사업을 하려 하였으나 이 마저도 다른 곳에 자금을 탕진하고 심한 좌절과 실의에 빠지면서, 빈털터리로 아내가 있는 시카고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두번째 신앙체험 및 새삶의 시작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아내가 건내준 사업자금도 탕진 했고, 제가 시카고에 온후 두세달 직장없이 집에 있었는 데도, 아내는 구박 한마디 없이 내가 벌어 올테니 걱정말라고 저를 따뜻히 보살펴 주었습니다.

      아내와
      11 전 구역장등 주위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새로운 직장을 시카고에서 잡게 되면서, 생활이 안정이 되고, 성당에서도 성가대와 1지역3반장을 하면서 교회 활동도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좋지 않은 습관들도 여전히 있었고, 성당 미사를 제외하고, 기도라고는 식사 기도
      화살 기도가 전부 였었습니다.

      이러던 차에 시카고 남성 15차 꾸르실료교육을 한다는 것을
      주보에서 접하고, 내심 교육참가를 하고 싶은 맘이 있었을 때, 울트레아
      회장의 권유에 즉시 가겠다고 응답하였습니다.

       

      꾸르실료
      교육중에 성경을 읽는데, 글이 정말로 똑똑히 살아 움직이면서,
      글귀들의 뜻이 저의 가슴에 팍팍 박혀 오는 경이로움을 체험하였으며, 꾸르실료 마지막 미사때 주님의 몸과
      피를 모신후에는 하염없는 뜨거운 눈물과 흐느낌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 뜨거운 눈물 은총은 1983년 청년봉사대원들과 함께
      받은후 30년만에 주님께서 제게 내려주신 은총이였습니다.

      타성적으로
      따라서 읽었던 하느님께서는 온갖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어 입김을 불어 넣으신 저희들의 주인이며,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저희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어 사흘 만에 부활 하신 기적을 행하신분이라는 말씀들이 새롭게 제게 다가 왔습니다.

       

      해외
      생활에서의 타락한 생활에 대한 통회와 좋지 않은 습관들에 대한 반성 및 영적생활에 대한 성찰을 하게되었습니다.

       

      꾸르실료을
      수료하고 나오니, 세상이 달라진 것은 없지만, 제 자신이
      피조물과 사람들을 보는 시각이 달라져, 많은 것들이 새롭고 아름다움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쁜 습관들도 고쳐졌으며, 더욱이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으며, 영적비데오를 통해 믿음을 단단히 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게으름 피우며 설거지 하기 싫을 때도 벌떡 일어나 아내의 손을 덜어 주는 좋은 습관도 생겨 났습니다

      묵상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대화를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그전 보다 더 빨리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기 위해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30년전에
      받은 은총을 관리 못하고 저버려 내가 누군지,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지만

       

      이번에 다시 받은 은총으로 주님이 나를 만드신 주인이며, 주님이 온갖 피조물과 함께 살도록 했으니 하늘에서 하느님 뵙는 날까지 즐겁게 살아야 하고, 자신을 끝임없이 복음화 하며, 이웃과 주님의 은총을 나누고 복음화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의 글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리며
      마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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