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연중 제17주일(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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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창세 18,20-32 콜로 2,12-14 루카 11,1-13

       

      끈기 있는 청원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기도의 대부분은 하느님의 도움을 요구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그 사람을 위해서 청원하겠다는 약속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그들이 알기를 바란다. 이런 우리의 기도에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시는 동시에, 단순하게 청하고, 구하고, 찾으라고 알려주신다.

      이렇듯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위해서 청원하는 것은 고대로부터 인간성에 존재하는 요소였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청소년들이 부모님께 늦은 시간의 통금에 대해서 조율하는 모습처럼 보여진다. 이런 모습을 모든 가족들 속에 보여지는데 약간의 조정 후에 적정한 결과들이 나오게 마련이다.

      흔히 ‘목적지를 묻기 위해서 멈추는 것보다 길을 잃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하는 운전자들에 대한 조크를 들었을 것이다. 질문 혹은 청하는 것은 무지와 약함 또는 필요를 인정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누군가로부터 방향이나 충고 또는 도움을 청하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것은 ‘Gimme People’(욕심꾸러기, 청하기만 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기도 생활로 옮겨진다면 참으로 곤란스러운 모습을 겪게 될 것이다. 주님께 청하지도 않는다면 무슨 기도를 올릴 수 있겠는가? 물론 하느님 찬미와 감사와 용서를 청하는 기도를 드릴 수는 있지만 그 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을 배재할 수는 없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도 끝임 없이 청하라는 기도였다. 심지어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마셔야 할 잔을 치워주실 수 있기를 청하였다. 또한 십자가 위에서는 당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아버지께 기도를 청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아버지께서 우리의 요구를 모르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의 필요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선함에 우리의 신앙이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아버지께서 아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알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하느님을 설득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하신 분으로서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결국 우리가 청하는 기도의 목표는 우리의 삶 속에 하느님의 현존이 자리 잡히게 하기 위해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시다. 우리의 부모님처럼, 가족처럼, 지금 이곳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소중한 친구처럼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청원한다는 것은 우리가 책임자도 아니며, 조정자도 아니고 독립되어 있는 것도 아님을 되새기는 것이다. 하느님께 끊임없이 청하는 것은 관계성과 믿음과 유대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기도는 청소년들이 부모님께 귀가 시간을 연장해달라고 조르듯이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속담처럼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습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함에 그치지 않고 더 큰 선물 성령의 선물을 받기 위한 것이며, 아버지와 우리가 하나임을 깨닫게 되는 방법임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오늘도 주님의 기도를 포함하여 내가 주님께 바라는 것을 끊임없이 청하는 하루가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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