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연중 제12주일(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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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즈카 12,10-11;13,1 갈라 3,26-29 루카 9,18-24

       

      내가 따르는 예수님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생각처럼 나의 구체적인 생활에서의 고백도 다양하다.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따라서 예수님의 모습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분의 모습을 묵상할 때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처음 우리에게 오신 나약한 구유의 아기 예수님의 모습에서부터,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에 대한 오랜 기다림의 결정체로 고백될 때, 죄인들과 함께 하며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 엄하게 꾸짖으시며 당신 사랑의 불을 보여주실 때, 죽은 이의 모습을 슬퍼하며 다시 일으키실 때,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실 때, 제자의 배반을 예견하실 때,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끝나 보이는 순간에도, 부활하신 영광의 모습으로 권능을 갖추셨을 때, 다시 오실 주님의 날을 기다릴 때 등등.

      내 삶의 모습이 어떠한지 그것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모습을 옷 입듯이 입어 본다면 나의 지금의 모습을 확실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한분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완전한 하느님이라는 것을 교리의 내용으로가 아니라 삶의 고백인 신앙으로 대답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비로운 사랑의 고백이기에 완전한 이해를 얻기에 힘이 들지만, 내가 따르고 믿고 바라는 예수님의 모습이기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매일 자신의 십자가 곧 구원의 샘물이 솟아나는 주님의 옷을 입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하늘나라에서 그 모습을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바라는 예수님의 모습은 고통과 수난과 죽음의 예수님인가? 아니면 모든 적들과 악을 쳐 이기시는 능력의 예수님인가? 예수님은 전자의 모습을 통하여 죄와 부정을 씻어 줄 샘으로 다가오신 분이다.

      이천년이 지난 오늘의 나에게도 역시 이 복음의 말씀은 어렵게 다가온다. 그것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리고 무엇이 우리에게 최선의 것인지를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부정하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아버지의 뜻.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서 살아가라는 초대다. 이미 메시아로 오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하느님과 우리를 화해시키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셨다. 그리고 십자가의 형틀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의 역설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할 때마다 언제든지 재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말하느냐?”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말하느냐?”

      이제 그 답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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