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성녀 캐서린 드렉슬 동정녀 기념일(3월 3일)

Viewing 1 post (of 1 total)
  • Author
    Posts
  • #1118
    정하상성당

      예레 18,18-20  마태 20,17-28

      왜 고발하는가?

      이상한 생각 하나, 나는 지금도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나는 크면 무엇을 하는 사람이 될까?’ 엉뚱해보이지만 내가 나중에 어떤 모습이 될 것을 그려본다면 내가 지금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이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인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예언자 시대나 예수님 시대처럼 지금도 주님의 말씀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더구나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순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예레미야는 자신의 목숨을 잃을 위험에서 주님께 기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의 말씀은 사람들을 화나게 하거나 흥분시키는가? 그것은 그들이 하고 싶은 것들을 막기 때문이다. 오늘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서로 다투는 모습 또한 자신들이 청하고자 했던 높은 자리를 두고 서로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

      나는 주님의 말씀을 얼마나 오해 없이 듣고 있는가? 나는 주님의 말씀을 말하면서 거절당한 적이 있는가? 누군가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으로 설겨해보았는가? 내가 바라는 것은 어떤 특별한 가르침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예언직이라는 것을 아는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봉사직으로 나아가라는 것을 아는가?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이 무엇 때문에 거절당하고 고발당해야 하는가? 그저 자신의 삶과 다르다는 것을 넘어서 자신들의 처지가 위태롭게 느껴지기 때문에 사형 선고를 내리려는 것은 아닌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운 것인가? 진리를 말하는 것이 힘든 것인가? 왜? 내가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지 않고 남겨둔 것이 문제가 돼서 더욱 못 견뎌 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곁에 둘 수 없고 자신이 바라는 이야기만을 해주기를 바라는 순간 귀가 닫히고 눈이 멀고 행동이 둔해진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삶이 자신들이 생활하는 범위에서는 불편함이 없기에 잘못이 없다고 느끼거나 누군가를 구석으로 몰아세우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대리 만족을 느끼는 동시에 범죄의 구속력을 넓혀가려는 것은 아닐까? 흔히 자신이 문엇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기보다 자신이 어떻게 대접을 받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아마 이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진리를 바라보는 눈과 주변을 살피는 이해력이 넓어질 것이다. 이제 왜 고발을 하여야만 하는지, 무엇을 고발하는지를 살펴보면서 주님의 말씀을 깊이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Viewing 1 post (of 1 total)
    • You must be logged in to reply to this top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