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사순 제2주간 금요일(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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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창세 37,3-4.12-13.17-28

       

      왜 죽이려하는가?

       

      우리가 남들을 용납하지 못하거나 비난하게 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용납하지 못하거나 비난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살아오면서 만든 것으로 자기방어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내 안에는 욕구와 불복정의 생각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내가 소작인으로서의 자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는지를 알게 도와준다. 시기 질투가 인간의 내부 안에 자리하는 것은 자신의 것이 빼앗기지 않으려는 강력한 소망이다. 그런데 ‘자기 소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 어린 생각일 뿐이다. 그래서 이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자기가 갖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현존과 우리 안에서 작용하시는 은총을 받아들일 틈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단순한 하느님의 말씀이나 뜻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특권이라는 것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집짓는 자들이 내버린 돌의 가치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나의 고집의 작은 울타리 안에서 죽음으로 내모는 경기를 계속해야만 할 것이다. 사실 하느님께 충실하게 믿는 삶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불림 받았음을 말하는 동시에 어려움과 고통을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저항을 받게 된다는 것을 하늘나라의 박해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오늘 말씀 속에서는 어떻게 되는지 기다려보는 표현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계획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시는지를 바라볼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그러기에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한 불쾌함으로 반대의 삶을 꾸미며 죄의 동조 세력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오늘은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직무와 책임에 대해서 묵상해보면 좋을 것이다. 결혼 때 배우자를 바라보던 시각과 결혼 생활을 어느 정도 보낸 뒤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는 왜 생겨나는 것일까? 단순한 성의 차이만은 아닐 것이다. 바로 자기는 살고 상대방을 죽이려는 혹은 상대방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모습 때문은 아닐까?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처럼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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