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Theory 그리스도교 전례의 본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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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제 1 장 그리스도교 전례의 본성1) 장신호 신부 역 1.1. 전례 1.2. 성서에 나타난 예배의 개념 [전례]라는 용어에 대한 고찰은, 그 용어가 유래한 고전 희랍어에서부터 헬레니즘, 성서 그리고 그 이후의 문서들을 차례로 살펴봄으로 이루어진다. 이어서, 구약과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그리스도교 예배의 의미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겠다. 1.1. 전례2) 오늘날 제의적 의미로만 사용되는 [전례]라는 용어의 역사는 사실은 다양한 시기에 따라 여러 의미를 수용하는 과정을 거쳤음을 보여준다. [전례(리뚜르지아liturgia)]라는 용어는 고전 희랍어에서 유래한다. 그 희랍어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동사형-전례하다-은 레이뚜르게인leitourghein, 명사형-전례하는 사람-은 레이뚜르고스leitourghos)는 라오스laos(이오니아에서는 레오스leos, = 백성)와 에르곤ergon(= 일, 업무) 두 단어의 합성어에서 유래한다.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를 문자그대로 번역한다면, “백성을 위한 업무”, 혹은 “공동선을 위한 직접적인 봉사”가 된다. 1.1.1. 헬레니즘에서 그리스 백성에게 있어서,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의 애초의 근본적인 의미는 아주 협소한 것으로써, “법이나 관습에 규정된, 그리고 공동선을 위한, 그래서 많은 금전의 투자를 필요로 하며, 통상적으로 조국에 공헌하기를 원하는 부유한 시민으로부터 행해지는 봉사”를 말했다. 거기에는 여러 종류의 레이뚜르기아가 있었다: 그리스식 극장에서의 합창단의 공연, 한 선박의 장비, 국경일에 한 부족에 대한 환영 등. 나중에 특히 이집트 지역에서 이 단어는 모든 공공사업을 일컫는 말로 이해되었다. 또한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대표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제의적 봉사를 뜻하게 되었다. 1.1.2. 구약성서에서 구약성서 ’70인역'(LXX=그리스어역, 약 기원전 250-150)에서, 이 용어는 사제들과 레위인들에 의해 행해진 성전의 제의적 봉사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들의 번역을 위해 사용되었다. 즉, 레이뚜리기아leitourghia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 거행되는 대중적이고 공식적인 예배를 뜻하는 전문용어로, ’70인역’이 라뜨레이아latreia(예배)나 둘레이아douleia(공경)로 번역하는 백성에 의한 사적인 예배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70인역’으로써 헬레니즘 영향아래에 있는 유대민족의 종교적 정서 안에 도입된 용어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는 이스라엘의 제의직무의 특징들을 표현하는데 특히 적합했다. 사실, 이 용어는 “어떤 장엄함과 연관된 대중적 봉사, 공동선익을 목적으로 하는 업무, 그리고 공식적으로 선발된 자에게 한정된 직무”등의 의미를 포함하기에 더욱 그러했다. 1.1.3. 신약성서에서 신약성서에서 이 용어는, 구약성서에서 약 150회 나타나는 것에 비해, 그 다양한 형태를 모두 합해도 겨우 15회 나타난다. 그 의미는; 대중적 언어로 ‘영예로운 대중적인 봉사’라는 세속적 의미; 구약성서의 제의적 의미; ‘영적 예배’라는 의미; 그리고, 그리스도교 예배라는 뜻으로는 단 하나의 본문이 있으니, 그 직역을 소개하면: “그들이 단식을 하며 주님께 예배드리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말씀하시니…” (사도 13, 2)이다. 이것이 나중에 그리스도교 전례liturgia christiana라고 불릴 이름을 식별할 수 있는 유일한 신약성서 본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 어휘가 성찬을 일컫는다고 확실하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모여서 기도하였고, 그 기도는 안수로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파견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이 불확실하고, 또 비록 그 예배의 성격과 내용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는다 할지라도, 신약성서에서 유일하게 이 곳에서 레이뚜르게인leitourghein이 그리스도교 예배를 가리킨다는 것은 증명되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나 그 파생어가 사도행전 13, 2의 경우를 제외하고 그리스도교 예배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틀림없이 그 단어들이 구약성서의 레위 사제직에 너무 밀접해 있었고, 또 그 사제직은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상황에서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한 편, 신약성서는 성별된 사람, 성별된 제구, 예배, 성전, 예배장소 등을 말하기 위해 제의적 용어의 사용을 회피한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제의적인 용어들(예배, 희생제사, 희생제물, 봉헌 등)은 자주 그리고 통상적으로 세속적인 환경과 사물들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언어적 변덕이 아니라 신약의 아주 정밀한 편집의도를 찾아볼 수 있다: 제의적 의미에서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는 다만 유대인들의 공적 예배만을 의미하며(루가 1, 23; 히브 8, 2.6; 9, 21; 10, 11 참조); 이 단어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적용되었을 때는 영적 예배의 삶을 말한다는 것이다(로마 15, 16; 필립 2, 17 참조). 1.1.4. 속사도시대 문헌에서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는 곧 유대기원 그리스도교 계통의 속(續)사도시대 문헌에서 – ‘디다케’3), ‘클레멘스 교황의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4) 등 – 구약성서의 제의적 의미와 함께, 그리스도교의 제의적 의미로 또 성찬례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교 예배를 두고, 그 이전의 유대 예배와 비교하여 말하는 이런 방식은, 틀림없이 이 용어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로 하여금 유대 제의적인 의미를 떨쳐버리고, 초 세기에 교회용어로 정착되는 길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예루살렘 대성전의 파괴(70년) 이후, 예수의 제자들은 모세의 규정을 그저 참되고 결정적인 종교를 위한 준비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제 구약성서적 예배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구원적 예배의 예표로 이해되었다. 이런 정황에서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는 (옛 예배에서 새 예배로 넘어가는) 교량역할을 하는 단어이다. 1.1.5. 그 이후 시대에 이 용어는 그렇게 정화되었음에도 교회의 여러 지방에서 동일한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동방(그리스어권)에서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는 일반적 의미로는 그리스도교 예배를, 특수한 의미로는 성찬례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 결과로 오늘날 특정한 전례예식에 의한 성찬례를 우선적으로 의미한다. 그래서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 바실리오, 성 야고버, 성 마르꼬 등의 리뚜르지아liturgia를 말하는 데; 이것은 특정 성찬예절과 성찬기도에 의해 거행되는 성찬례를 말하는 것으로, 그 단어의 그리스어 어원에 의한 뜻이다. 반면에, 서방(라틴어권)은 그 용어를 완전히 모르고 있었다. 사실 신약성서의 대다수의 희랍어 용어들에서처럼, 이 용어는 라틴화되지 않았다. 따라서 서방 라틴어권에서는 수 세기동안 리뚜르지아liturgia대신 무누스munus(직무), 오피치움officium(업무), 미스테리움mysterium(신비), 사끄라멘뚬sacramentum(성사), 오뿌스opus(업무), 리뚜스ritus(예절), 악찌오actio(행위), 첼레브라찌오celebratio(전례거행) 등의 어휘를 사용하였다. 서방세계에 라틴용어 리뚜르지아liturgia는 16세기에야 비로서, 옛 전례서들과 교회의 예배에 대한 것들을 가리키는 학문용어로써, 다시 등장하게 된다. 18-19세기에 개신교회또한 이 용어를 채택하여, 그리스도교 예배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비오 10세 교황(재임1903-1914) 때와 그 이후 1917년의 교회법전을 출발로 하여 교황청 문서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곧 서방교회의 공식 용어로 계속 사용되었다. 위로 1.2. 성서에 나타난 예배의 개념5) 이제 성서에 나타난 예배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은 역사적 탐구라기 보다는, 성서신학적 종합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약성서는 예배의 독창적 개념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삶이 기원하고 발전한 토대와, 구약성서 예배와 관련된 그 연속성의 흐름을 무시할 수는 없다. 1.2.1. 구약성서에 나타난 예배 종교적 인간은 신적존재와 만나기 위해서 일상(소위 말하는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특별한 시간, 공간, 사람, 행위 등에 상징적 가치를 부여하고, 이들을 하느님과의 상봉을 위해 선별된 것들로 간주한다. 이렇게 해서 거룩한 영역이 생긴다. 성서적 전통도 거룩함(성성)에 대해 많이 할애하고 있다. 그러나, 성성을 마치 분리된 공간개념 – 특히 세속으로부터 – 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항상 그 전통 안에 있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배와 일상 사이에 긴밀한 연결을 이룩하도록 만드는 저변의 역동성은, 바로 역사의 하느님이신 야훼에 대한 신앙이다. 다른 종교의 제의구조들은 삶을 향하여 있으니, 사실 그것들은 삶과 역사가 포함하고 있는 의미들을 상기시키는 표지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정체성을 역사 안에 개입하신 하느님과의 관계 위에 세운다. 그러므로, 그 예배는 역사적이고 예언적이다. 이런 예배의 역사적이고도 예언자적인 본질을 보다 잘 표현하는 개념은 바로 기념제memoriale6)이다. 이것은 마치 서랍의 밑바닥에서 옛날의 빛바랜 사진들을 되찾아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과거로부터 수집된 일정한 기억들을 회상하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다. 제의적 기념memoria은 공동기념commemoratio의 살아있는 행위이다. 한 백성이 또는 한 집단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이런 공동기념 행위를 통해서이다. 원초적 과거는 이런 식으로 복구되어 오늘날에 살아있는 기원설화가 된다. 기원설화는 은총의 선물로 현재에 받아들여진다. 더 나아가, 미래에 대한 모든 계획은 이 전통에 뿌리박기 마련이다. 사람은 과거의 기념을 가지기에 비로소 미래를 가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선조들”이 아니라 (신명 5, 3) 현 세대와 계약을 체결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는, 예배의 중심적 역할이 과거에 대한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현재화에 있음을 보여준다. 예배는 이렇게 시공의 간격을 잊어버리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려 한다: 하느님은 과거에 여러 장소에서 그저 활동하신 것이 아니라, 동일한 방법으로 또 효과적으로 “지금 여기에hic et nunc” 활동하신다. 파스카 기념제에서 이스라엘은 과거를 마치 현재에 주어진 선물처럼 받아들이고, 이 선물은 미래의 약속을 보증해 준다. 미래에 대한 이런 전망은 새 계약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에 의해서 다만 조금씩 그 광대함에 도달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역사가 언급될 때, 출애급은 가장 토대가 되는 역사체험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정치적 측면에서는 해방과 백성의 형성이라는 흐름이지만, 종교적으로는 참회와 야훼에 대한 신앙의 수용이라는 흐름이며, 그 자체로 특정한 종류의 예배를 설정한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섬기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형성되어 ‘사제적 백성’으로 탄생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영성에서 예배와 계약의 이행 사이에는, 즉 예배와 삶 사이에는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다. 구약성서는 계속 반복하여 예배와 삶 사이에 존재하는 이 내밀한 결합을 강조한다. 여호수아 24장의 시켐의 대중연설은, 과거사를 구세사로 선포하는 하느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따라 율법을 준수하는 백성의 응답 사이의 밀접한 관련를 힘있게 강조한다. ‘해방자이신 아훼를 역사 안에서 만남’, ‘예배에서 그 만남의 흥겨운 거행’, 그리고 ‘계약에 충실한 일관된 삶의 응답’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세 가지 근본적인 순간들이다. 여호수아에 대한 백성의 응답도 웅변조이다. “우리는 우리의 하느님 야훼를 섬기고 그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여호 24, 24). ‘섬기다’라는 동사의 사용은 주님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의탁을 표현한다. 이상적 삶의 전망 속에 역사, 예배, 그리고 율법 간의 긴밀한 관계가 드러난다. 예배에 대한 이런 이상적 전망이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삶을 항상 이끌어 주지는 못하였다. 이스라엘은 형식주의의 유혹에 자주 빠지게 되어, 야훼에 대한 신앙의 응답을 형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사이에 실질적인 결별이 심해졌고; 예배는 예배를 이끌어내는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도, 또 예배에 뒤따라야 할 삶으로부터도 분리되어 버렸다. 이스라엘이 넘어간 유혹은 삶의 수준에서 계약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잊어버린 채, 예배 그 자체에 집착한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예언자들의 태도가 해석되어야 한다. 제의의 변질에 대한 격렬한 예언적 비판은 유명하다. 그들은 희생제사에 대해(이사 1, 11-13; 예레 7, 21-22; 아모 5, 21-25 참조), 성궤에 대해(예레 3, 16), 성전에 대해(예레 7, 14; 26, 1-15) 실랄한 판결을 선언한다. 하느님께서 “이 백성은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간다”(이사 29, 13)라고 말씀하시는 그런 예배를 이들은 고발한다. 신적계획의 증인인 예언자들은 마음없는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하느님과의 계약 조건들을 선언하면서, 다가올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예배를 향하도록 초대한다(에제 37, 26; 40-48 참조). 이런 모든 비판은 예배를 능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계약의 생생한 실천 속에서 예배를 보존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예언적 비판을 역사와 예배 – 역사에 대해 기념제를 거행하고 내적인 윤리생활을 돕는 예배 – 에 대한 단순한 비판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이다. 예언은, 역사적 현재 그리고 종말론적 미래 뿐만 아니라 역사의 과거와도 관련을 가지고 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에게 그때까지 살아왔던 것들, 그리고 지금은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상기시킨다(예레 2, 11 참조). 그들은 예배를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만나는 장소로 존재해야하는 예배의 올바른 역할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제의적 실천을 단죄한다. 즉, 아모스에게 있어서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은, 단순한 제의적 행위나 이론적이고 지적이고 사색적인 탐구도 아니요, 내면과 관련된 신비체험도 아니라, 정의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 속에 행해진다(아모 5, 4-6;14-15 참조). 또한 예레미아는 성전에서 참회의 열매없는 말뿐인 예배의 헛됨을 고발한다(예레 7 참조). 벤 시라(집회서의 저자)는 율법에 대한 충실과 제의적 예배를 긴밀히 결합시킴으로 예언 전통의 진정한 상속자로 자신을 드러낸다. 집회서 35장에 의하면 율법의 실천은 그 자체로 참된 예배이다. 벤 시라는 예배에 관해서는 엄격한 예배주의자이며, 동시에 율법을 지키는 데 민감한 율법주의자이다. 구약성서에서 “율법(토라torah)”이란 구약시대 계시 전체, 즉 구원으로 이끄는 길을 따르도록 초대하는 주님의 말씀과 행업으로 이루어진 신적 계시 전체의 가장 기본적인 메시지를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예배는 예언적 고발의 압력으로 정화되었다. 이런 이기적이고 형식적인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도 그리스도는, 완전한 예배를 시작할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말라 3, 1-4)과 진정한 예배를 살아갈 필수적 조건인 참된 정의의 의미를, 시편기도를 통해 보전하는 “가난한” 마음을 발견할 것이다. 위로 1.2.2.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배 구약성서에서 신약성서로 넘어감은 동시에 ‘연속성’과 ‘단절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예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참된 것이다. 공생활 기간동안 유대 전례봉사 앞에서 예수께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우선 느껴지는 것은 ‘종속성’과 ‘자유’ 이 둘이 혼합된 태도이다. 예수께서는 한편으로 자기 백성의 제의적 실천을 준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예배보다 정신을 우위에 두는 예언자들의 노선을 따른다(마태 5, 23-24; 마르 12, 33 참조). 그리스도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 실천으로 율법을 요약하고 꿰뚤는다. 같은 방법으로 예수께서는 예배의 영역에서 예배자체의 가치/무가치를 결정하는 근본조건을 드러내니, 그것은 사랑과 형제에 대한 용서(마태 5, 23-24; 15, 5-9; 마르 7, 6-9 참조)였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영적이고 참된”(요한 4, 24) 예배, 즉 당신 자신의 실천으로 모범을 보인, ‘자신 자신의 온전한 삶으로 봉헌되는’ 새로운 예배를 설립한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구약성서적이고 유다이즘적인 모든 제의규범들은 소멸되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의 시작과 함께 사람은 직접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들게 되었고, 따라서 이해하면서 기쁘게 하느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예배는 “참신한” 것이니, 왜냐하면 삶과 병행하여 이룩해야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실존 자체 때문에 성립되기 때문에, 즉 “그리스도 안에” 생활하는 사람들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실존은 그리스도교 예배의 충만이다. 왜냐하면, 예배라는 명칭에 합당한 모든 것은, 사람들을 위해 예수를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신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결정적 사건에 의해 표시되었기에 그러하다. 히브리서는 구약성서의 모든 제의적인 용어들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 그리스도는 성전이요, 아니 성전보다 위대한 이요; 영원한 대사제이며, 그리스도인들의 최고 전례집전자liturgo이며;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유일한 중재자이다. 그리스도의 전 실존은, 자신의 생명을 희생 제물로 봉헌하는 데서 절정에 도달하는(히브 10, 5이하 참조), 속죄의 사제직무였다. 영광스럽게 되시고나서,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당신의 사제직을 수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고,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로마 5, 1이하, 히브 10, 19이하 참조). 성전을 두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2, 19)은, 제의적 형식주의에 대한 예언적 비판을 너머, 예배 자체의 새로운 창립을 선언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참신성은 다만 파스카 이후에야 밝혀질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예수의 영광스러운 육신 이외의 성전을 가지지 않는다. 또한 그의 십자가만이 제대요, 그분의 존재 자체만이 사제요 희생제사다. 그리스도의 육신, 혹은 그분의 인성은 하느님의 성전으로 존재하는 이외에, 또한 – 구약성서적 예언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때 – 옛 제의적 규범의 희생제물들을 대체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최후까지 성취하려는 그리스도의 순종은, 그리스도교 예배로 하여금 새롭고 참신한 단계로 향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태도는 새롭고 유일한 제의적 모범이 된다. 예배 규정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이제 그 백성에게 – “유대인이건 그리스인이건” – 더 이상 성전과 율법으로 대표되는 구원의 이중적 설립을 통해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함께하시고; 그리스도인들의 ‘우선적’ 예배는 사랑과 신앙을 통해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의 이런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교 전례 봉사를 가리키는데 제의적 용어들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니; 그 용어들은 성전의 구약적 예배를 특징짓는 데 필요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현존 동안 이룩된 사건들과 세상 안의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을 암시하는 데 필요할 뿐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감도를 받아 그리스도와의 통교 속에서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이 되고, 거룩한 사제가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1베드 2, 5)게 된다. 신자들의 일반사제직sacerdotium commune을 선언하는 이 유명한 구절(또한 1베드 2, 9참조)은 공동체의 영역에서의 사제적 봉사를 말하는 것이기 보다는, 일상적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이 세상을 향한 사제적 임무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이 임무의 “세속적” 특성과 또한 “말로 설득하지 않더라도”(1베드 3, 1)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그 목적성을 강조한다. 이렇게 해서 세상 안에서 신앙인의 온 실존은, 성령의 선물에 충실히 수미일관하게 살아감으로 이 마지막 시대의 완전한 제사, 즉 참으로 ‘영적인 제사’가 된다. 이 교리는 성 바오로의 다음 말씀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영적) 예배입니다”(로마 12, 1). 세속으로부터 떼내는 선발을 통해 이루어지는 ‘성별sacralizzazione’이라는 유대 개념은 세속의 ‘성화sanctificatio’라는 개념으로 대체되었으니; 신약성서의 발자취에 따른 그리스도인들의 전례와 희생제사의 첫째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으로 일상의 윤리적 삶을 성화하는 것이다. 사도교회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행위에 영감을 받아, 예식성ritualitas을 철회하지 않고도 그 강조점이 예식성에서 실존재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도록 하였고; 더 나아가, 여러 성서본문들은 ‘삶의 예배를 마치 성찬례의 연장으로 보는 시각’의 흔적을 제시한다(1고린 11, 17-34; 로마 12, 1-2; 1베드 2, 4-5; 요한 4, 23-24; 히브 10, 1이하 참조). 아버지께 대한 완전한 복종과 인류에 대한 봉사의 삶을 산(마르 10, 45 참조) – 다시말해 참된 희생제사요, 참된 예배가 된 – 예수께서는, 지상생활을 마치실 때 빵을 쪼개어 나누고 포도주 잔을 함께 마시는 제의적이고 상징적인 동작을 통해 그 삶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시었다. 이런 제의적이고, 반복가능하고, 전례로 거행할 수 있는 동작을 통해, 예수께서는 그분의 삶을 제자들에게 넘겨주시어; 제자들로 하여금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예절’과(“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Hoc facite in meam commemortionem”) 또 각자의 ‘실존’을 통해(“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Accipite et manducate”) 그분의 삶을 기념토록 한다. 비록, “기념제memoriale”로 남겨주시려고 몇몇 제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성찬을 행하기는 하셨지만(아마도 성찬은 파스카 만찬을 배경으로 이루어 졌으며, 그리고 그것은 대중을 위해 마련된 성스런 장소에서의 집회라는 배경에서가 아니었으리라), 예수께서는 제의적인 희생제사를 드리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삶의 희생제사(자신의 증여와 봉헌이 되는 죽음)를 봉헌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각자의 삶을 하느님께는 합당하고, 형제들에게는 도움이 되는 봉헌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은, 그리스도의 중재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의 희생제사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 가능성은 결국 그분의 희생제사의 열매 안에 지속적인 종속성으로 남는다. 이 종속성은 필수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실존 속에 구체화 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성사들, 특히 성찬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 안에서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요, 또한 고유하게 그리스도교 예배에서 특히 성찬례에서 종말론적 결정적 실재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이런 전례거행은 구원의 때kairos – 다시 말하면, 과거에 이룩된 구원이 성사적으로 현재화되고, 종말론적 결정적 실재를 미리 맛보게 하는 은총의 순간을 – 이룬다. 사실, 신앙인들은 – 개인적으로건 공동체적으로건 – 성찬례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한 몸을 이룸으로, 신적 생명의 통교 속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드린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중재행위의 성사이기에,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중재의 영향을 실질적으로 충만히 받도록 해준다. 성체성사없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은 그리스도의 실존에 충만하게 결합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교 예배를 정리할 수 있다: 즉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하신 결정적인 사건의 기념이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를 “영적으로 참되게”(요한 4, 23-24) 예배하는 진실한 사제적 백성이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1고린 12, 12-13참조)을 이루는 구원받은 이들의 새로운 공동체가 거행하는 기념이다.7) [이 글은 현재 로마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중인 대구대교구 장신호 요한보스코 신부님께서 번역하신 자료입니다.] 위로 1) 이 부분은 마티아스 아우제(Matias AUG )의 저서 Liturgia – Storia, Celebrazione, Teologia, Spiritualit , Edizoni Paoline, 1992 Milano, pp. 11-23″의 번역이다. 2) A. Romeo, Il termine “leitourghia” nella grecit biblica, in: Miscellanea liturgica in horerem L. Cuniberti Mohlberg, vol. 2, Roma 1949, pp. 467-519; K. Hess, Servire, in: Dizionario dei concetti biblici del Nuovo Testamento, a cura di L. Coenen – E. Beyreuther – H. Bietenhard, Edb, Bologna 1976, pp. 1741-1743; S. Marsili, Liturgia, in: Aa.vv., Anamnesis – La liturgia, momento nella storia della salvezza, Marietti, Torino 1974, pp. 33-45; Id., Liturgia, in: NDL, pp. 725-742; J. L pez Mart n, “In spirito e verit “. Introduzione alla liturgia, Edizioni Paoline, Cinisello Balsamo 1989, pp. 52-55. 3) “여러분은 자신들을 위해 감독들과 봉사자들을 선출하되 주님께 합당하고 온순하고, 돈을 좋아하지 않고, 진실하며, 인정된 사람들을 선출하시오. 그들이 여러분에게 예언자들과 교사들의 직무(leitourghian)를 수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다케 15, 1; 정양모 역주, {사도들의 가르침 – 디다케}, 분도출판사, 1993, pp. 96-97). 4) “그분이 우리에게 봉헌과 전례를 명하시되 무질서하게가 아니라 정해진 시간과 상황에 따라… 대사제에게 특정한 전례 임무가 맡겨지고…” ( Clemente, Prima ai Corinti 40, 2.5, in: I Padri Apostolici, traduzione e introduzione e note a cura di A. Quacquarelli, Citt Nuova, Roma 19894, p. 76, 역자 사역). 5) S. Lyonnet, La natura du culte dans le Nouveau Testament, in: Aa.vv., La Liturgie apr s Vatican II. Bilans, tudes, perspectives, Cerf, Paris 1967, pp. 357-384; F. Hahn, Il servizio liturgico nel cristianesimo primitivo, Paideia, Brescia 1972; M.-F. Lacan, Culto, in: Dizionario di teologia biblica, pubblicato sotto la direzione di X. L on-Dufour, Marietti, Genova 19724, pp. 236-242; E. Schweizer – A. D ez Macho, La Chiesa primittiva, Paideia, Brescia 1980; A. Bergamini, Culto, in: NDL, pp. 333-340; X. Basurko, El culto en la poca del Nuevo Testamento, in: Aa.vv., La celebraci n en la iglesia, I. Liturg a y sacramentolog a fundamental, S gueme, Salamanca 1985, pp. 53-70; B. Maggiani, Liturgia e culto, in: Nuovo Dizionario di teologia biblica, a cura di P. Rossano – G. Ravasi – A. Girlanda, Edizioni Paoline, Milano 1988, pp. 835-847; L.-M. Chauvet, Simbolo e sacramento, Una rilettura sacramentale dell esistenza cristiana, Ldc, Torino-Leumann 1990; Aa.vv., La liturgie dans le Nouveau Testament, in: Introduction la Bible, dition nouvelle, vol. 9, Descl e, Paris 1991. 6) 이 용어는 히브리 어근 ZKR(“기억하다”)에서 유래한다. Zikkar n과 azkarah는 자주 70인역(LXX)에서 mnem synon 혹은 an mnesis로 번역되었다. (K. H. Bartels, Memoria, in: Dizoinario dei concetti biblici del Nuovo Testamento, 위의 책, pp. 990-996 참조). 7) A. Vanhoye, Liturgia e vita nel sacerdozio dei laici, in: Aa.vv., Sacerdozio e mediazioni. Dimensioni della mediazione nell esperienza della Chiesa, a cura di R. Cecolin, Messaggero, Padova 1991, pp. 21-40. [출처 : 전례학 동호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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