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Family ‘가정’은 하느님의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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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가정’은 하느님의 영역- (안 철민 아브라함신부 -샌디에고 한인천주교회)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제 동창 중에 지리산 청학동이 고향인 신부가 있습니다. 이 신부가 신학교를 들어가기 위해서 부친을 찾아 뵙고 “제가 신부가 되려고 합니다.”하고 말씀드렸더니 부친께서 “천주교 신부가 뭐 하는 거냐?”하고 물으시더랍니다. 그래서 “신부는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하고 말씀드렸더니, 아버님 입에서 떨어진 말씀이 “역천(逆天)!”
      즉, 하늘의 이치를 거스른다고 역정을 내셨답니다. 하늘의 이치를 거스른 제가 가정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하니까 참 어렵습니다.

      교회는 예로부터 성가정의 모범으로 요셉과 마리아, 예수님이 꾸린 가정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적인 눈으로 가늠해도 그리스도교 신앙 역사 속에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뛰어넘을 만한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분들께서 꾸린 가정의 모습을 알아보려면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어서 구체적인 가정의 형태를 알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냥 인간적인 눈으로 예수님이신데, 성모님이신데 오죽 잘 사셨을까 하며 넘어갈 수 있겠지만 그래도 성경에 나오는 단편적인 증언에 의해서라도 성가정에 대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요셉 마리아 예수님의 가정이 어떠했느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세 분이 이룬 가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하게 해 주는 증언은 있습니다.

      먼저 요셉 성인입니다. 요셉 성인에 관해 알 수 있는 성경의 증언은 마태오 복음 1장 18-25절에 나옵니다. 약혼녀 마리아가 자기 아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기를 임신한 것을 알게 된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천사가 전해 준 이야기를 듣고는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지요. 요셉의 삶을 뒤바꿔 놓은 이 사건에서, 요셉이 생각을 바꾸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 중, 루카복음 1장 26-28절을 보면 갈릴래아 나자렛 시골처녀에게 천사가 나타나 뜬금없이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고 전해줍니다. 마리아는 이 뜻을 수용하고 처녀로서 아이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시골처녀 마리아의 삶을 뒤바꾸는 이 사건에서도 역시, 모든 것의 근원에는 하느님께서 자리하고 계십니다.

      다음은 예수님이십니다. 신약 전체가 예수님을 증언하지만 인간적인 면에서 바라보게 해 주는 구절은 루카 복음 2장 34-35절의 시메온의 예언입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예수님 또한 성부 하느님 때문에 이미 걸어가야 할 삶이 정해진 것입니다.

      이 세분을 ‘성가정의 모범’이라고 하는데 이 세분이 성부 하느님이 아니었다면,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요셉은 자기 아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한 마리아와 파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겠지요. 마리아는 보통의 여인처럼 사랑하는 남편의 아이를 갖고 그렇게 살았겠지요.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에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뜻에 따랐다면, 예수님도 세상에 오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뒤바뀌어 서로 연결되며 세 사람이 가정을 이루게 된 근원에는 하느님이 자리하고 계셨습니다. 어쩌면 전혀 상관없이 살아갈 수도 있었을 요셉, 마리아 예수님은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한 가정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성가정’이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가정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무관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지금의 나의 남편, 지금의 나의 아내, 지금의 내 아이가 실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연결되었음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성모님께서 묵묵히 마음속에 간직하며 기다려 줄 수 있었던 것도 당신의 가정이 하느님에 의해 꼴 지어졌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의 나의 배우자는 나의 선택으로 뽑은 것이지만 나의 선택을 통해 이뤄진 가정은 하느님께서 뽑아 세운 하느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하느님의 영역에 속합니다.

      오늘은 가정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뽑아 세워주신 나의 남편, 나의 아내, 나의 아이에게 사랑과 신뢰, 존경과 감사를 드리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아멘!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Bartolome Esteban Murillo)의 <강아지와 함께 있는 성가족>, 1650년경,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어린 예수님은 새를 붙잡고 드물게 젊게 묘사된 요셉의 무릎에 기대서 작은 강아지와 함께 놀고 있다. 이러한 세부 묘사들은 친밀함을 더해주는데 언뜻 보기에는 화목하고 행복해 보이지만 예시적 의미를 보면 어린 예수님의 손 안에 있는 작은 새는 수난을 상징한다. 바느질과 방적은 마리아의 일상적인 가정 활동이다. 무리요의 회화에서는 세부묘사가 일상의 삶을 실제로 반영한다. 배경에는 요셉의 목수용 작업대와 도구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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