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2012년 대림 제2주일 묵상 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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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대림 2주일(12 9)

      바룩 5,1-9 필리 1,4-6.8-11 루카 3,1-6

      길을 준비한다는

      예화를 옮겨 본다.

      형제들 가운데 사람이 스케테의 원로 이시도로 아빠스에게 물었다. “악마가 그렇게도 당신을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원로가 대답했다. “내가 수도승이 순간부터 입술에서 분노를 막으려고 애써 왔기 때문입니다.

      아타나시오 아빠스는 매우 얇은 양피지로 18펜스짜리 책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담겨 있었다. 언젠가 형제가 그를 찾아왔다가 책을 가져가 버렸다. 아타나시오 아빠스가 책을 읽으려고 , 책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형제가 가져갔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는 형제가 도둑질뿐 아니라 거짓 증언을 하게 될까 두려워 책에 대해 문의하도록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한편 형제는 책을 팔기 위해 가까운 마음로 내려갔다. 그가 요구한 값은 16펜스였다. 책을 사려던 상인이 말했다. “그 책이 그만한 값어치가 되는지 알아보도록 책을 저에게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상인은 책을 거룩한 아타나시오에게 가지고 가서 말했다. “사부님, 책을 보십시오. 제가 16 펜스를 주고 만한지 말씀해 주십시오. 정도의 값어치가 있는 것입니까? 아타나시오 아빠스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훌륭한 책이고, 그만큼 값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인은 형제에게 돌아가 말했다. “돈을 받으십시오. 책을 아타나시오 아빠스에게 가지고 갔는데, 그분이 이것은 16펜스의 값어치가 있는 훌륭한 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뭐라고요? 그분께서 다른 말씀은 하셨나요? 하고 형제가 말했다. 상인이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하자 형제가 말했다. “저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책을 팔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서둘러 아타나시오 아빠스에게 가서 눈물을 흘리며 책을 다시 받아주기를 청했지만, 아빠스는 책을 받지 않고 그에게 말했다. “형제여, 평안히 물러가십시오. 책을 당신에게 선물합니다. 그러나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께서 책을 다시 받아주시지 않으면 저는 결코 평화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평생 아타나시오 아빠스와 함께 살았다.<토머스 머튼이 길어낸 사막의 지혜 중에서>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도록 인도하시는 분의 뜻을 새기면서, 주님을 맞이하는 날까지 걸어 나가는 우리 각자의 삶을 묵상하며 살아가는 주간의 날이 되어보자.

      대림 2주간 월요일(12 10)

      이사 35,1-10 루카 5,17-26

      쉽게 이루시는 구원

      하느님 편에서 보면 쉬운 일인데 인간의 입장에서는 어렵게 느껴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실상 이스라엘의 귀향과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축복의 메시지라는 것은 알겠지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주님께 다가가고 싶어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간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는 것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쉬운 방법을 설명해주시면서 치유의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신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치유하시는 것을 인간인 우리가 이해할 있도록 가르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풍병자이든 다른 모든 병자이든 스스로 있는 사람들보다는 도움을 받아야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주님을 찾아 나선 것이다.

      문제는 이런 기적과 치유가 일어나고 있는 현장에서도 하느님을 모독하는지를 살피며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통하여, 모든 문제들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넘어서는 권능의 힘으로 중풍병자를 일으켜 돌려보내신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라면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마무리 된다.

      이제 우리의 생각과 방식을 새롭게 해야 때다. 주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주시고, 우리를 돌보시는데, 우리가 무엇을 걱정하며, 두려워해서 더욱 어렵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쉬운 방법을 어렵게 추구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쉽게 요령을 피우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답게 정의와 공정과 함께 어울리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있도록 우리의 삶을 주님의 법에 따라 어린이와 같이 살아가도록 준비해보는 것은 어떨까? 초등학교 숙제 가운데 하나였던 일기장이 있었다. 날마다의 날씨를 써야했는데, 방학 숙제는 언제나 형과 누나의 공책을 따라갔다. 왜냐하면 그래도 쉬운 방법이 준비되어 있던 형과 누나의 공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과 법을 따라 살아가면서 그분께서 매순간 이뤄주시는 구원의 손길을 체험하는 오늘은 살아보자.

      대림 2주간 화요일(12 11)

      이사 40,1-11 마태 18,12-14

      내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경치, 시원한 바람, 눈사람, 맛있는 음식, 즐거운 대화, 한잔의 여유, 기도 시간, 여행, 베드민턴, 사진, 음악, 그리고 배움

      밖에도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찾지 못한 기쁨도 듬뿍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마리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과 비교해보면 어떨까? 욕심으로 채우고 싶어하는 마음과 달리 누구 하나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정리를 해야 한다.

      부족한 것에 집중적으로 관심과 사랑을 쏟아 붓는 기쁨을 알고 있다면, 앞서 열거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나를 이끄시고 사랑하시기 위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영광을 비춰주신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모든 것들이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선물이었다는 것을 더욱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우리는 세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놀라운 선물을 통하여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통하여 아버지께 어떤 영광을 드릴 있는지 찾아 나서자.

      대림 2주간 수요일(12 12)

      이사 40,25-31 마태 11,28-30

      신뢰는 나의

      어떤 연구에서 서로를 믿을 없는 조건으로 만들어 놓고, 부정적 정보만 준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하지 않아도 답이 나올 것이다. 그와 반대로 서로와 하나가 되는 과제를 주며, 긍정적인 결과를 제공해 준다면 앞으로도 그들은 더욱 기적을 일궈내는 사람들로 거듭날 것이다. 역사극을 보다보면 간혹 왕을 독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음식을 미리 맛보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한 정성과 맛있는 재료에 솜씨를 더한 것에 대한 믿음은 물론 왕에 대한 사랑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되새겨본다.

      주님께 모든 무거운 짐을 맡기면 주님께서 안식을 주신다고 하신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길을 배우면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안다고 말할 있는 주님의 길은 순탄하지도 않고, 역경과 모함 그리고 배신과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정녕 그분의 멍에가 편하고, 그분의 짐이 가볍다고 신뢰할 있을까? 흙탕물과 찻잔에 떠오르는 부산물들은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게 마련이다. 우리의 삶에 진정 신뢰가 없다면 어떻게 순간인들 편안하게 살아갈 있겠는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길은 아버지께 대한 신뢰’였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모든 현상들은 이것을 교란시키기 위한 방해물일 뿐이다.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를 믿을 있다고 말할 사람이 있거나 그런 대상이 나를 향해 있다면, 우리는 더욱 힘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역경도 그것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생각과 마음으로 갖게 신뢰가 힘을 발휘한다면, 진정한 행위에서 자라나는 믿음은 우리를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살아갈 있도록 이끌어 것이다.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12 13)

      이사 41,13-30 마태 11,11-15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

      ‘하루살이 무서운 모른다.’는 속담에서 나타나듯이, 우리는 역설적인 깨달음을 놓쳐서는 된다. 하루를 살든지 이틀을 살든지 범을 만나지 않는다면 무서울 것이 없다. 그가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맞이해야 마지막 순간뿐이다.

      아이들을 가르쳐본 경험이 있다면 아마도 여러 가지 어려운 점들을 토로할 있다. 가운데 아이들의 마음과 시선을 집중시키기 어렵다는 말을 제일 많이 듣게 것이다. 그런데 진정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가르친다고 다가선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를 더욱 깊이 살펴보아야 것이다.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단순히 노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루고 싶어하는 비전’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것은 그가 지금 무엇인가에 깊이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 게임에 중독된 모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새롭게 배우고 알게 어떤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런 중에도 수업에서 요구하는 과제는 수행할 있다. 그랬으면 됐다. 아이는 꾸준히 수업에 집중한 것이고, 자신이 더욱 가치를 두고 있는 것에 자발적으로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이야기처럼 들릴 있지만 실재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어떤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소중한 의미와 정신은 사라지고, 정해진 틀에서 생명력을 잃어가는 공식을 종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표현은 아마도 우리가 바라는 모습대로 움직여지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해보면 어떨까? 예언의 종착점인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인정받은 사람을 우리가 알아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있겠는가? 이제 주님의 말씀 속에서 새롭게 생기를 회복해야 시간이다. 그리고 말씀에서 () 깨달아 세상 속에서 어떤 것을 이용하든 자발적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할 있도록 준비해보자. 진정 생명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이다. 그리고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십자가의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12 14)

      이사 48,17-19 마태 11,16-19

      돌지 않는

      게으름을 방지하기 위해서 꾸준히 무엇인가를 만들 어른들의 손놀림을 떠올려 본다. 농사를 지어 적은 없지만 농한기에 어른들이 짚으로 방석과 짚신을 만드셨다는 것은 기억한다. 무엇인가를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매일 일거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노년이 풍요롭게 된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순간도 낭비하거나 허비할 없는 보물과도 같다는 것을 실천하기 쉬울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요한의 모습이든 예수님의 모습이든 어떤 것에 휩싸이지 않으면서 주님을 따라나서게 것이다. 흔히 성당에 사람보고 나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사람으로 인하여 신앙생활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을 말하거나 듣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들은 자신에게 말씀이 살아 쉬는지 아닌지를 평가할 있는 기회라고 받아들일 있기를 바랄 뿐이다.

      어느 단체에서든지 성격차이 일수도, 수줍음이 많아서 일수도, 대인 공포나 광장 공포증이 있어서도, 도는 사람이 생겨날 있다. 아니면 무엇 때문에 서로 분쟁이 생기면서 어울리지 못하게 만드는 상처를 간직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있다. 좋은 것이 아님에도 그런 것들을 간직하는 관계로 용서하지 못하고 돌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어떨지 걱정이다. 자신과 다른 모습과 생각을 지녔을 뿐인데, 자기를 따르지 않고 방해한다고 생각하면서 하느님을 따르며 봉사할 있을까? 그리고 주님을 올바르게 고백하며 그분의 말씀과 법을 따른다고 말할 있을까? 옷도 멋으로 입지만 착용감이 좋아야 하듯이, 돌지 않는 삶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것이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대림 2주간 토요일(12 15)

      집회 48,1-4.9-11 마태 17,10-13

      앞서 와야 하는 엘리야

      사람의 삶의 환경 속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동물이 개다. 그래서 개에게는 특별한 애정이 들어간다. 가운데 취해 잠든 주인 곁에 불이 나자 자신의 몸에 물을 적셔 주위의 불을 끄고 주인을 구했지만 자신은 죽고 이야기도 유명하다. 이렇듯 하느님의 진노의 불이 떨어지기 전에, 불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지파들을 재건하는 역할을 엘리야를 깊이 바라보아야 한다.

      엘리야는 온유함과 단호함을 함께 지닌 예언자다. 하느님께 대한 열정으로 자신을 불사른 그는 강한 바람과 지진과 속에서가 아니라 부드러운 소리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다. 그런 그가 바알 예언자들 450명을 상대로 불사르는 하느님의 능력을 선보인다. 또한 자신의 격정과 분노와 온갖 고행과 결백과 순수한 열정에 지쳐 절망하며 무력하게 죽기를 바라는 모습으로 비춰졌던 예언자다.

      그러나 예언자 엘리야는 부드러운 소리에서 다가오신 하느님을 대변해주는 인물이다. 세상의 모든 악을 쓸어버리시는 진노의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을, 모든 것을 가르고 부수어 뒤섞이게 만드는 분이 아니심을, 모든 부정을 태워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선포한 예언자다. 열정만으로 격정적이고 완고하며 금욕적인 모습을 기대했던 분열과 대립과 전멸을 생각했던 모습에 부드럽고 온화하며 섬세하고 상냥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신 분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증거한 예언자다. 그리고 이것은 불수레를 타고 회오리바람 속에 휩싸여 하늘에 오르는 순간까지 이루어지는 평생의 작업이었다.

      이제 엘리야가 주님에 앞서 와야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면, 우리의 삶도 주님의 성탄과 더불어 다시 오시기 전까지 준비해야 무엇인가를 실천하는 하루하루를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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