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2012년 대림 제1주일 묵상 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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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대림 1주일(12 2)

      예레 33,14-16 1테살 3,12-4,2 루카
      21,25-28.34-36

      날이 온다.

      초보자인 내가 낚시를 하러 가면, 선장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선장이 낚싯줄을 내리라고 말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물고기를 낚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농사를 처음 시도해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농부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그의 지침대로 땅을 솟구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아 주는 수고를 따라가야 한다. 이것 또한 풍성한 농작물을 거두기 위한 확신이기 때문이다. 운동을 배울 때도 그렇다. 사실 우리의 가운데 단순히 세상의 멘토라는 표현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중요한 가르침을 받으며, 믿고 살아가야 때가 있다.

      약속을 이뤄주시는 분의 선포를 듣는다. 믿음이 가는 사람에게서 듣는 마디의 말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를 알고 있다면, 우리가 주님께 믿음을 두고 그분의 약속을 기다린다면 이것은 참된 설레임이 것이다. 교회력의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지니는 축복이 바로 약속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불리는 날이 다가올 때를 기다리면서 우리의 역시 주님의 의로움을 실천할 있도록 받아들일 있는 넉넉함으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있도록 준비되는 사랑의 삶이라고 바오로는 말해준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이다.

      날은 반드시 온다. 그러나 때에 맞추어 그분을 있기를 희망한다면, 오늘의 수고와 노력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대축일(12 3)

      신명 10,8-9 1코린 9,16-19.22-23 마르
      16,15-20

      존재함의 선물

      자신에게 주어진 가운데 지금까지 가치를 유지하면서 앞으로도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필요를 위해서, 유행을 따라서, 편리함을 쫓아서 취득했지만 실재로 그것의 가치를 깨닫고 충분하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본다.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법을 깨닫고 그것에 맞추어 자신을 훈련하는 것과 같다.

      오늘 우리는 의무와 직무로 맡겨진 것에 대해서 듣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 자체를 살아가면서 전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을 통하여 받은 것을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모든 것이 되기 위한 그의 삶의 기쁨을 바라보고 싶다. 쉬운 예는 아니지만 장엄한 죽음을 앞두고, 혹은 신념으로 인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마지막 세상은 어떤 풍광일지를 생각해보고 싶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 자체에 대한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가 아닐까?

      주님 친히 그들의 상속 재산이 되셨다.

      대림 1주간 화요일(12 4)

      이사 11,1-10 루카 10,21-24

      우리가 보도 들은

      우리는 ‘명작(名作) 혹은 ‘명창(名唱) 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가 있다. 그대로 세상에 가치를 새롭게, 분명하게, 깊이 있게 드러내는 작품이나 사람에게 뒤따르는 표현이다.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는 작품 세상에서는 세상의 모습을 풍자하거나 고발 혹은 비평하면서 나아갈 바를 알려주는 빛이 스며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소리와 좋은 작품들을 바라보기를 원하는가 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그분께서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대대로 세운 표징(탈출
      31,13)
      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 우리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를 회복하는 날이 되도록 거룩하게 만들어진 날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짜 신들이나 우상들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던 우리가 주님의 날에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세상의 걱정이나 일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래서 모든 힘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기에 하느님의 집에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상이라고 한다면 ‘신() 현존’을 대체하는 것이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고 모든 것이 관리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 우리의 통제력이나 조정력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 예가 있다. 그래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하느님의 관대함에 의해 지배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에 의해 지배되는 불운한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안식일의 선물>
      p26)
      그러나 이사야의 메시아가 도래한 평화의 왕국을 바라보면서, “나의 거룩한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11,9)”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우리가 바라보고 듣게 것은 하느님을 아는 지혜이며, 우리의 삶에 참된 평화의 주님을 만나게 것이라는 것이다.

      대림 1주간 수요일(12 5)

      이사 25,6-10 마태 15,29-37

      참된 가치가 있는 잔치

      다이아몬드의 질량을 나타내는 캐롯은 중동에서 자라는 캐롭이라는 열매의 크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의 도량과 측정 능력은 우리의 속에서 그리고 주변에서 발견되어 왔었다. 그러니 다이아몬드 캐롯과 과일 캐롭은 가치가 차이가 없었을 시대를 생각해보면서, 우리의 원래의 가치와 품위가 없어지지 않는 세상을 꿈꿔본다.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벌어지는 하느님의 잔치와 예수님께서 치유를 해주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먹이시는 잔치는 하나의 공통점을 지닌다. 바로 우리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시며,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잔치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이끌어 주신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시는 치유와 용서와 사랑은 우리 자신의 각각의 가치와 같다는 것으로 바꿔보고 싶다. 이상의 수치와 죽음과 눈물은 사라지고, 우리에게 필요했고, 우리 자신의 본래의 가치가 드러나는 기쁨과 축복으로 가득한 잔치가 열리게 된다. 이로써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을 고백하는 잔칫상이 열리게 된다.

      오늘을 시작하면서 나는 어떤 것을 주님께 받았으며,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고백하는 동시에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만날 모든 것들의 가치를 얼마나 깨닫고 있는지를 준비해야겠다. 그래서 오늘이 참된 가치가 회복되는 진정한 잔칫상이 되도록 만들어보자.

      대림 1주간 목요일(12 6)

      이사 26,1-6 마태 7,21.24-27

      장수마을

      어느 나라에서든 장수에 대한 관심은 있다. 그래서일까? 소식을 해야 한다. 잠을 많이 자야 한다. 운동을 해야 한다. 등등의 이야기들이 가득 넘친다. 그런데 마음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 삶의 질을 찾으면서 장수하는 것이 아닐까? 매일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을 빼야하고, 중독증에 걸릴 만큼 운동을 해야 하며, 잠이 오지 않아도 자야한다면 그것은 장수를 위해 살아가는 조건이 아닐 것이다.

      주님을 부르기만 한다고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뜻을 실행으로 옮겨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든 것들은 참된 행복 선언에 깨알같이 담겨져 있다. 문제는 이것을 어떤 마음으로 실천하느냐다. 주님을 반석으로 여기며 든든히 신뢰하고 자신의 것을 내어 놓으면 그분께서 보호해주시고 사람이 되게 주신다는 약속을 결실로 받게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최고의 존재이신 분께 회복시켜주시기를 청하면서 나아갈 있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사람이 것이다. 이처럼 주님의 법을 소중히 여기면서 주님께서 친히 나를 바꿔주시기를 청한다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것이다.

      ‘나만 열심히 살면 무엇하겠는가?’라고 투정하며 묻자 묵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열 명의 자식이 있는데 명만 농사를 짓는다면 더욱 열심히 일해서 먹여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이제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아무리 작아 보이더라도 주님의 뜻에 있음을 잊지 말고, 주님의 집에서 영원히 누릴 생명을 바라보며 꾸준히 살아가는 하루를 만들어보자.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12 7)

      이사 29,17-24 마태 9,27-31

      인생 역전

      세익스피어는 말했다. ‘세상에 좋고 나쁜 일은 없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과연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공간에서 우리의 마음을 제대로 다스릴 있으며, 정확하게 표현할 있는지 고민해봐야겠다. 예수님께 믿음의 응답을 받은 명의 장님도 주님께서 그들의 믿음대로 이뤄주실 것을 고백하였다. 그들은 진정 눈을 뜨게 되었으며, 예수님께 관한 이야기를 선포하는 사람으로 바뀐다.

      누구나 자신의 처지를 만족하면서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보다 낳은 무엇인가를 꿈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 속에서 모든 것을 뽑아내고, 원리를 찾으며, 삶을 다듬어 나갈 있다면, 말씀 속에서 우리의 인생을 역전시킨다는 표현이 과장은 아닐 것이다. 또한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믿음의 길과 방법을 깨닫고 따라나설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속에서 형제와 자매로 새롭게 태어나는 공동체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확인할 있기에, 우리의 모습에서 회개와 변화를 체험할 있게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말씀을 접해 두면, 언제든지 그것을 우리에게 되새겨주시는 분이 있다. 그리고 때와 순간을 위해 준비된 이야기를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담아주신 것을 뽑아 주시는 분이 있다. 이것을 알면서도 말씀을 멀리할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다고 말할 있다. 진정한 인생 역전을 향하여 믿음의 말씀에 다가서는 오늘이 되어보자.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12 8)

      창세 3,9-15.20 에페 1,3-6.11-12 루카
      1,26-38

      모든 축복의 연결 고리인 어머니

      복을 충분히 받고 살아가는데도 무슨 탐욕이 생겨나는 것일까? 그런데 무엇이든지 속에 있을 때는 그것의 가치를 모르는 것처럼, 빼앗기고 나서야 복을 깨닫는가보다. 그리고 이런 탐욕으로 인하여 중요한 것은 빼먹고, 가치 없는 것을 챙기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불순종과 책임전가의 죄를 씻어주시고 은총의 삶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리고 축복의 연결 고리로 마리아를 택하셨다. 인간의 죄를 인간의 순명으로 치유하셨다는 것은,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으로 바꿔주시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몫을 나눌 있는 상속인의 지위를 회복하게 것이다.

      흔히 귀한 대접을 받는다든지, 값지게 대우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치와 효능이 좋아서 만이 아니라 희귀성과 양식(養殖) 불가능하기 때문은 아닐까? 언제든지 구할 있거나 대체할 있는 것이라면 값진 대접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께 귀한 대접을 받고 있으며, 그것을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셨는데, 모든 것을 가능하도록 마음 깊이 간직하면서 믿음으로 순응한 여인이 오늘 우리가 바라보는 어머니시다. 우리 육신의 어머니 또한 유일하며 소중하듯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낳아 주신 어머니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믿음의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하루를 시작하자. 그래서 우리도 ‘가장 복된’ 사람이 되도록 주님께 봉헌하는 오늘을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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