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Prayer_contemplation 차 신부님의 사순절 묵상집 – 사순 제4주간 월요일(4월 4일)

Viewing 1 post (of 1 total)
  • Author
    Posts
  • #13087
    정하상성당

      기쁨의 도시를 살아가는 표징


      예루살렘은 예수님 시대로부터 11세기 전, 다윗 왕이 즉위한 몇 년 뒤에 처음 건설된다. 그 곳은 큰 즐거움을 위해 창조된 기쁨의 도시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도시를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신다. 그것은 건축물 때문이 아니었다. 그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리고 성전이 허물어 질 것이고 짓밟힐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우선적인 거처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고팔고 먹고 즐기고 지내며, 거룩하고 기쁨의 도시로 살았다. 그러나 지금의 예루살렘과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의 모습은 그렇게 거룩하고 기쁨의 도시로 느껴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꼭 예루살렘이 아니더라도 주님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도시들 특별히 뉴 올리언즈나 바그다드, 이라크, 워싱톤 등등의 도시들을 명명하지 않더라도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어떠한가? 기쁨의 도시인가? 슬픔의 도시인가?

      우물가의 사마리아의 여인과 마을의 다른 사람들과 이틀을 보내신 뒤 갈릴래아의 북쪽 가나라는 도시로 이동 중이던 예수님은 카파르나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병든 아들을 두고 찾아 나선 왕실 관리를 만나신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 아들을 고쳐주시도록 동행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과 더불어 아들이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왕실 관리는 그 말씀에 믿음을 두고 돌아가 살아난 아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온 집안이 주님의 빛을 믿게 되었다.

      오후 한 시 즈음에 열이 떨어졌다는 말을 전하고 있는 요한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가장 빛나고 강렬한 빛을 내는 시간에 고쳐 주셨음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어 두 번째 표징을 일으키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기적처럼 놀라운 예수님의 일이라고 말하지 않고 ‘표징’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다. ‘표징’은 그 자체로 작은 표시이지만 그 너머에는 놀라운 무엇인가가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을 표징들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분이 함께 계시기에 우리에게 참 기쁨과 치유와 화해와 평화가 자리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과거의 기쁨의 도시였던 예루살렘의 뜻을 깨닫고 살아가는 우리의 현 주소가 되어야 함을 되새겨 본다. 그리고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삶 속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빛으로 오셨고, 우리는 그 빛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주님을 따라 살아가게 될 것임을 고백해보자.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표징을 따라 기쁨의 도시를 만들어보자.



      (기도)

      성령이시여, 내 마음에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채워주소서. 어둡고 힘들고 지친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보호하심을 깨닫고 고백하게 하소서. 우리가 시간이 더해갈수록 예수님께서 진정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깊이 있게 깨닫게 도와주소서. 나의 온전한 마음으로 내가 살아있는 모든 날에 더욱 열렬하게 당신의 사랑에 응답하게 하소서.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요한 4,50)


    Viewing 1 post (of 1 total)
    • You must be logged in to reply to this top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