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주님 수난 성지 주일(4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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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이사 50,4-7 필리 2,6-11 마태수난기 26,14-27.66

       

      (행렬 때)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는 것에 대한 의미를 미리 알고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같은 신앙의 고백으로 노래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오시기로 되어 있는 오랜 기다림의 메시아를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이제 우리가 기억하는 행렬은 주님께서 필요하신 과정이었으며, 우리가 그 여정을 따라가면서 우리에게 오신 임금님, 사랑과 진리의 메시아를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을 바라보며 행렬을 시작합시다.

       

       

      (미사 강론)

      예수님의 수난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

       

      오늘을 우리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근거는 우리가 읽게 되는 수난기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개인적으로 희생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주님의 수난에 대해서는 성주간을 이용하여 묵상하게 될 것이며, 지금은 그분의 예루살렘 입성을 중심으로 묵상해 본다.

      우리는 그분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의 상상과 오랜 기다림으로 바라보던 분을 맞이하게 된다. 그 분께서 당나귀를 타고 도성으로 들어오신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기꺼이 심판과 죽음을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분께 우리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분은 누구신가?’

      우리는 백성들을 향해 다가오시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그리고 그분께 겉옷을 깔아드리며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고 외치는 소리를 들어본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그리고 불과 며칠 후에 우리는 전례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흔들리는 믿음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서약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분을 더욱 깊이 알아야 한다는 것에 있다. 오늘의 독서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왜 우리는 그분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모습을 증거 해주고 있다. 이사야는 고통 받는 종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예언적이며 시적인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 끝가지 충실하기에 고통을 받으신다. 시편 22장의 표현대로 십자가 위에서 “나의 주님, 나의 주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노래하듯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받으셔야 했던 고통의 깊이를 드러내주고 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는 아버지의 뜻과 그분께 대한 믿음만이 존재하게 된다.

      두 번째 독서는 오래전부터 인용되어왔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찬송의 유품으로 자리하게 된다. 그것은 일찍이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인간의 권력이 아닌 섬기는 이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봉헌하시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님으로 고백된다. 그러나 깊은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그것은 수난에 대한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픈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세웠지만 이제 그의 적들 앞에서 어떤 도움의 손길도 없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가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법들 가운데 죽음에 처해지는 것보다 강한 사랑, 곧 우리를 위한, 벗을 위한 사랑의 단계를 따라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죄에서 죽고, 옛 습관에서 죽으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배우는 사랑의 길임은 분명하다.

      다시 한 번 묻는다. 예수님의 더욱 충실한 제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이분은 누구신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성주간을 통하여 하나하나 열거되는 말씀으로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풍요로운 시간이며 가능성이 있는 희망적인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희망의 위대함 속에 우리가 누구였고, 어디에서 왔는지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게 될 것이다. 오직 오늘을 통하여 다시 시작하는 주님의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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