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주님 수난 성금요일(4월 22일)

Viewing 1 post (of 1 total)
  • Author
    Posts
  • #1639
    정하상성당

      이사 52,13-53,12 히브 4,14-16; 5,7-9 요한 수난기 18,1-19.42

       

      우리의 사랑으로 드러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주님에 대한 신비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수많은 기적과 말씀들이 완성으로 나아가는 순간이다. 예수님을 뒤따랐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자비로운 행동에 대한 증인이 된다. 그러나 그 순간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이 죽으실 때 어떠하였겠는가? 오순절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신 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 메시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왕 중의 왕이었지만 그분의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수도 예루살렘의 어좌에 오르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려고 올라가셨다. 사제 즈가리야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갈릴래아의 한 여인은 하느님의 탄생 예고를 믿었다. 이 모든 일들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 하느님의 뜻이었지만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수난과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통해서였다.

      어쨌든 주님의 수난과 고통과 죽음의 장면은 우리에게 죄책감과 부끄러움과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한 깨달음과 타인에 대한 잘못들을 떠올려준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회개와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겠다는 다짐이 없다면 일시적인 감상에 그치고 말 것이다. 죄책감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그것은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정으로써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어떤 자극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 안에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즉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생겨날 수 없는 감정이다. 따라서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매우 건강하다는 표현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부족한 부분들에 대한 발견과 더불어 우리의 행동과 동기를 조정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정신을 차리게 될 것이며, 죄책감으로 느끼는 모습이 우리의 마지막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말씀이 나쁜 느낌으로 다가온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양심이 살아있어서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필요한 조정을 찾아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죄에 대한 회개의 표지로 계약을 세울 때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느끼는 죄책감이라는 장치를 통하여 우리의 여정을 올바른 길로 설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강한 부분과 약한 부분, 좋은 모습들과 좋지 않은 모습들을 주님의 손에 맡기며, 그분의 사랑을 체험할 때가 다가왔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수용과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통교이며, 화해의 마당이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회개와 하느님의 뜻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복음이 된다. 이것은 오랫동안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다리셨던 일치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분의 약속에 대한 실현을 이루시기 위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돌아서기만 한다면. 이제 왜 교회가 성금요일을 Good Friday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Viewing 1 post (of 1 total)
    • You must be logged in to reply to this top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