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Theory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

Viewing 1 post (of 1 total)
  • Author
    Posts
  • #69120
    정하상성당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

      1225.jpg

      ”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1- 공동체가 미사 봉헌하는 제대, 성당의 중심”

       그리스도인은 신앙 증진을 위해, 그리고 위로를 받기 위해 성당을 찾아 기도를 한다. 하지만 미사 전례에 익숙하지 않는 갓 영세한 신자나 세례성사를 준비하는 사람, 그리고 가톨릭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중에는 가톨릭 전례가 복잡하다는 선입견 때문에 선뜻 그리스도교 전례와 공동체의 참 맛(?)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미사에 참례할 때 알 수 없는 행동의 표현과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상징성에 대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이번부터 시작하는 조학균(예수회, 전례학 박사) 신부의 ‘미사 이야기’는 미사전례에서 표현되는 상징성에 대한 의미를 쉽게 설명, 신자들이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끌어 줄 것으로 기대된다.

      ▨ 성당 구조

       그리스도인이 처음 성당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제대와 그 뒷면에 있는 십자고상이다. 이는 제대와 십자고상이 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제대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 목요일에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하면서 성찬례를 거행했던 것을 재현하는 장소이며, 십자고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해 당신 스스로 속죄 제물이 되신 것을 설명한다.
       그리고 제대 옆에 은은히 빛나고 있는 작은 불빛 옆 감실(성체를 모셔 두는 곳)은 성당을 찾는 이로 하여금 푸근함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공동체가 함께 봉헌하는 미사 전례이며, 미사 전례 중에 성찬례는 제대를 중심으로 이뤄지기에 제대 위치는 성당 중심에 자리 잡는다.
       미사전례에 참여하기 위해 성당으로 들어가면, 성수대 성수를 손끝에 묻혀 십자성호를 긋고 앞좌석부터 적당한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조용히 침묵 속에 미사를 통한 은혜를 청하면서 미사 해설자의 지시에 따라 미사시작을 기다린다.
       
      ▲ 성수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입구 옆에 다소곳이 자리 잡고 있는 성수대에 성수가 있는데 모든 그리스도인은 오른손을 모아 성수를 찍어 이마에서부터 배 그리고 가슴으로 이어지는 십자성호를 그은 후 미사전례를 위해 자리를 잡는다. 이때 성수는 성스러움을 방해하는 죄스런 악마 등을 쫓음으로써, 더러운 것을 말끔히 씻어 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신자들은 성호를 그으며 “주님 이 성수로 저희 죄를 씻어 주시고 마귀를 몰아내시며 악의 유혹을 물리쳐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또 성수를 찍는 것은 성당에 들어가기에 앞서 세례를 기억하며 하느님께 속하지 않은 모든 것, 생각과 원의, 탐욕과 근심, 미움, 호기심 등을 모두 떨쳐 버리고 깨끗하게 되기를 바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성수란 말 그대로 거룩한 물이란 뜻이다. 거룩하다고 하는 이유는 사제의 축복 예식을 통해 거룩하게 된 물이기 때문이다. 물은 신학적으로 생명과 풍요, 죽음 그리고 정화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미사를 봉헌한 후 후 성당에서 나갈 때는 성수를 찍지 않는다.
       
      ▲해설자
       성당에서 ‘사회자’대신 ‘해설자’라고 하는 이유는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해설자는 다만 미사 진행 순서에 따라 참여 정신을 일깨워주고 그날 축제의 의미와 깊이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미사 전체의 소개자이다. 해설자는 미사전례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 중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을 유도하고 소개한다. 하느님 말씀을 해설하며 인간의 원의를 대독하고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도록 한다.
       따라서 해설자는 주례사제, 복사, 성가대, 독서자, 신자, 공동체가 할 일을 알리며 예절을 진행하는 중대한 임무를 갖고 있다. 잘 준비된 해설자는 신자들로 하여금 미사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끌어 주며, 그 내용을 잘 알아듣도록 도와준다. 그래서 간단명료하게 해설할 수 있도록 미리 잘 준비해야 한다.
       미사 해설자의 역할과 임무는 중요하다. 하지만 사제가 그리스도를 대신해 집회를 주재하기에 해설자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수행해야 한다.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2- 마음 정화하고 자비 청하며 미사 참례 “

      1. 미사전례-시작예식
       미사전례에 참여하게 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통일된 행동을 취하게 된다. 통일된 행동은 미사전례 참여자들에게 일치감과 공동체성을 느끼게 해준다. 시작예식은 모든 이들이 미사에 올바르게 참여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들으며 합당하게 성찬례 전례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마음의 정화를 이루게 해 준다.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고백하고, 자비와 용서를 청함으로써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시간인 것이다.
       사제와 봉사자들이 입당하는 도중에 교우들은 입당송 혹 입당성가(만일 입당송을 할 경우에는 성가를 부르지 않는다. 둘 중에 하나만 한다)를 하게 되며, 입당이 끝나면 사제는 제대에 정중하게 절을 한 후 교우를 향해 십자성호, 인사말, 참회예절, 사죄경과 주일(혹 축일과 대축일)인 경우에는 대영광송을 함께 한다. 시작예식은 사제가 본기도를 바치면서 마친다.
       
        1.1 십자성호
       그리스도인들이 미사전례에 참여하거나 혹은 기도를 시작할 때 처음과 끝에 하는 행동은 십자성호이다. 성수를 손끝에 묻혀 이마와 배 그리고 양쪽 어깨에 표시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표현인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며, 십자가 희생의 결과인 구원에 대한 희망을 표현한다. 또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자 가톨릭 신자임을 드러내는 외적 표지이다. 십자성호는 가장 단순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위이지만 가장 핵심적 신앙고백을 표현하고 있다.
       초기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성호를 통해 자신의 신원을 드러냈다. 오늘날 자연스럽고 당당한 자세에서 십자성호를 긋는 것은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임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2 참회예절
       그리스도인들은 참회예절로써 하느님과 화해의 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과 죄의식에 대한 인식은 스스로를 겸손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통해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참회예절 중 (가) 형식은 초기 공동체에서 공개적으로 하느님과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잘못과 죄를 고백하고 성모님과 천사, 성인들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 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하는 것으로, 아름답고도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한다. 미사 때나 혹은 다른 시간에 참회 기도를 드려본다면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하느님과의 만남과 통교를 위한 정화예식과 같은 참회예절은 사제가 공동체를 대표해 하느님께 자비를 청함으로써 마친다. 하느님의 자비 없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기에, 죄 용서는 하느님 몫이고 공동체와 개인은 단지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뿐이다.
       
        1.3 사죄경
       공동체를 대표해 사제는 하느님께 공동체와 개인이 범한 죄에 대해 용서를 청한다. 참회예절은 고해성사처럼 성사적 효력을 갖지 않지만, 예절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것을 약속하면서 용기를 얻는 중요한 기도문이다. 이때 사제가 팔을 벌리며 기도하는 자세는 초기교회 로마 카타콤바 벽화에서 발견되었으며, 두 손을 높이 펴들고 기도하는 자세는 거의 대부분 민족에게서 발견되는 가장 보편적 기도 자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도 이런 기도 자세를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아 손을 펴드는 자세는 높이 계신 하느님께 향하고 그분의 도움을 바라는 자세이다.
       
       1.4 아멘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마칠 때, 반드시 “아멘”으로 끝을 맺는다. 이는 앞서 기도한 내용을 다시 확인하며,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는 의미다. 사전적 의미로는 히브리말로 “신뢰할 만한”이며, 그리스어는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유다인들은 능동적으로 동의함을 나타낸다.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 3- 하느님 현존 깨닫고 공동체 기도 바쳐 “

      참 회가 끝나면 사제는 교우들을 위해 사죄경을 외우는데 이때 사죄경은 고해성사의 효과를 내지는 않는다. 사죄경 후 자비송(기리에, 엘레이손)을 바치는데 신자들이 주님께 환호하며 그분 자비를 간청하는 노래이기에 모든 이가 바친다. 곧 백성과 성가대 또는 백성과 선창자가 한 부분씩 맡아 교대로 바친다. 그 후에 모든 이들은 대영광송(주일, 축일과 대축일)을 함께 노래한다.
       
        1.4 대영광송
       대영광송은 그리스도교의 파스카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기에 부활 축제 때와 주일 그리고 축일, 대축일에 노래로 부른다. 일명 글로리아(Gloria) 혹 천사찬미가(Hymnus Angelicus)라고도 부르는 대영광송은 성령 안에 모인 교회가 하느님 아버지와 어린양을 찬양하고 간청하는 가장 오래되고 훌륭한 찬미가다. 동방에서 유래된 이 노래의 저자나 작사 연대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대영광송은 사람들에게 광명과 희망의 기쁨을 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삼위일체에 대한 근본적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대영광송은 다른 어떤 것과 대체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이기에 사제와 교우들이 함께 부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성가대의 특송 형태로 불려져서는 안 된다. 주일과 대축일(축일포함)에 주례사제의 선창으로 부르며, 사순시기와 대림시기때는 부르지 않는다. 대영광송을 노래하면서 의미를 받아들이면, 하느님께서 인간들 사이에 역사하심을 다시 한 번 알게 되고 하느님을 찬미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겸손함과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게 된다.
       
       1.5 본기도
       대영광송이 끝나면 사제는 양팔을 벌리면서 – 사제가 양팔을 벌리는 자세는 로마 카타콤베 벽화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기도하는 자세이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상기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리고 사제는 기도 중에 동쪽을 바라보면서 기도를 하는데 떠오르는 태양, 즉 빛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기도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예절에 참여하는 교우들과 함께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하느님께 바친다.
       그리고 모두 사제와 함께 잠깐 침묵하는 가운데 자신이 하느님 앞에 있음을 깨닫고 간청할 내용을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이때 사제는 신자들의 기도를 모아서 공적기도를 바치는 것이기에 사적 내용을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 바오로 6세 교황은 본기도에 대해 “사제는 신자들을 잠시 침묵 중에 함께 기도하도록 초대하는데, 이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개인 기도와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기 위해서이다. 이때 사제는 서서 팔을 벌리고 하느님을 향해 공동체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본기도는 원칙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며,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긴 맺음으로 마친다.
       - (성부께 바칠 때) …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혹
       - (성자께 바칠 때) … 주님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1.6 서는 자세와 앉는 자세
       시작예식을 하는 동안에 교우들은 십자성호, 참회, 사죄경, 그리고 대영광송과 본기도가 끝날 때까지 서 있는다. 이때 서 있는 자세는 환영, 기쁨, 존경과 실천 그리고 기도의 자세다.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자세는 서 있는 자세이며, 자녀로서 하느님 아버지께 바라는 것을 청할 때의 자세다.
       앉는 자세는 안정된 상태에서 조용히 듣고 묵상하기 위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주의 깊게 듣고 들은 것을 깊이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삶에 옮길 결심을 하려는 자세이기도 하다.
       
       시작예식에서, 모든 이들은 청원과 함께 참여하면서 ‘아멘’으로 화답해 이 본기도 내용이 자신들의 기도가 되게 한다. 미사에서는 언제나 하나의 본기도만을 바친다. 결국 시작예식을 마침으로써 공동체는 죄를 참회하고, 사제가 공동체를 대신해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여 마음을 정화시킨 다음, 하느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마음을 열고 말씀전례에로 초대되는 것이다.

      “[조학균 신부 미사 이야기] 4- 말씀전례, 하느님과 대화하시는 시간 “

      조학균 신부(예수회, 전례학 박사)

      말씀전례

      시 작예식에서는 교우들이 능동적이고 자발적이며 겸손한 태도로 하느님의 자비를 청했다면, 말씀 전례는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한 대화 안에서 당신 의중을 드러내시며 삶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말씀 전례는 하느님 말씀을 듣는 순간이며, 동시에 하느님과 교우들의 대화 시간이다. 즉 교우들은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여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역 사적으로 볼 때 초기 교회에서는 성찬례에 영세한 신자들만 참석했는데, 영세하지 않은 사람들이 성찬 예식 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라는 사제의 말을 잘못 이해할까봐 말씀 전례가 끝나면 돌려보내고 영세한 신자들로만 성찬례를 거행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말씀 전례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예비 미사, 혹은 예비신자 미사라는 말로 미사 전례 안에 있었다.
       말씀 전례의 중요성은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에서 강조됐고, 가톨릭교회에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성서부흥과 전례부흥에 힘입어 말씀 전례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으며, 나아가 미사의 본질적 요소로 자리 잡게 돼 성찬례와 더불어 미사의 골격을 이루게 되었다. 말씀 전례의 특성은 “하느님 말씀과 공동체의 화답”이며, 그 구조의 성서적 근거는 엠마오의 제자 사화(루카 24,13-35)와 사도 바오로의 트로아스 주님 만찬(사도 20,7-12)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말씀 전례에서는 하느님 말씀을 생생히 듣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기에, 교우들이 성경을 눈으로 읽거나 혹은 함께 읽는 태도는 말씀 전례의 의도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말씀 전례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의 구원 신비를 알려 주시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양식인 당신 말씀을 독서자 음성을 통해 전해주신다. 특히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백성에게 하늘의 신비를 직접 말씀하고 계신다는 확신과 더불어 당신 생애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잘 드러내고 있기에 말씀 전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다.
       
       4.1 말씀 전례의 의미와 가치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하느님 말씀을 받아 적은 것이다. 하느님 말씀은 단순히 일회성 사건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지금도 영속적으로 반복 계시되고 있다. 하느님 말씀은 항상 현재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교우들에게 구속과 구원의 신비를 열어 주시며, 영적 양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말씀 전례에서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의 의미를 다음 5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1)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직접적 말씀. 2) 구원 능력을 지닌 하느님 말씀. 3) 하느님 구원 업적의 기념과 선포. 4) 믿음을 낳고 기르는 말씀. 5) 참 생명을 주는 영적 양식.
       또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말씀 전례 안에서 하느님 자신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진리에 대해 강조하고 있으며, 특히 교회는 하느님 말씀과 주님 성체와 함께 거룩한 전례 안에서 모든 교우들이 끊임없이 영적 양식을 얻을 수 있고, 양육되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 말씀은 교회를 지탱하게 해주는 힘이 되고, 교회의 자녀들에게는 신앙의 힘, 말씀의 양식, 영신 생활의 깨끗하고 마르지 않는 샘이 되는 힘과 능력을 갖게 해주며, 신앙의 최고 규범으로 생각하게 해준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끊임없이 동참하기 위해 말씀 전례를 통해 주님의 전 생애를 기념하고자 교회력에 따라 봉독하고 있는데, 이는 듣는 이로 하여금 각자 마음에 새기도록 하고 말씀 안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 구원으로 인도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은총의 열매는 각자의 노력과 태도에 달려 있는데, 마르코 복음의 자라나는 씨의 비유(4,26-34)에서 보면, 말씀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지만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자세에 따라 다르게 열매 맺는다. 하느님 나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과 같이, 말씀이 함께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이 시작됐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5-말씀 전례의 구조”

      하느님 말씀 듣고 인간이 화답

      미사전례는 말씀 전례와 성찬례로 구성돼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미사에 참례하는 이들이 어떤 부분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가족을 구성하는데 어머니와 아버지 어느 분이 더 중요하냐고 질문하는 것과 같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 예식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성찬례에 참례하는 것은 다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2002년도에 발표된 「로마 미사 지침서」에 의하면 말씀 전례의 중심 부분은 성경 말씀들과 그 사이에 오는 노래로 이루어진다. 이어 오는 강론, 신앙고백, 보편지향기도는 이 중심 부분을 더 발전시키고 완결한다. 독서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구속과 구원의 신비를 열어 보이시며 영적 양식을 주신다. 강론은 봉독한 말씀을 해설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말씀을 통해 여러 신자들 가운데 실제로 현존하신다.
       이렇듯 미사전례에서 하느님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1) 말씀 전례에서 봉독하는 성경은 성령의 감도로 기록된 하느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말씀은 언제나 살아 있으며 힘이 있고, 신앙생활에 활력소가 되며, 나아가 신앙생활의 목적과 방향을 제시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구원 업적을 거룩한 표지와 말씀으로 기념하고 재현한다.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 말씀은 성경을 봉독할 때마다 특별한 모양으로 그 현존을 실현시킨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 전례 중에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현존하실 뿐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도(Hic et nunc) 성령의 능력을 통해 말씀이 뜻하는 바를 실현시키시며, 인간에 대한 성부의 사랑이 실제로 드러나게 한다.
       결국 말씀 전례 부분에 있어서 독서의 중심에는 그리스도 생애가 놓여 있으며, 교회가 지정하는 독서 내용은 성경 본문으로 이루어져야만 하고, 성경 이외에 그 어떤 책도 하느님 말씀을 대신해서 읽을 수 없다(새’미사 전례서 총지침(2002)’에 따른 간추린 미사 전례 지침, 19쪽). 말씀 전례에서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일상 생활 속에서 멀어진 하느님과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한다. 이로써 하느님과 대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즉 하느님과 그리스도인들과의 통교가 성경 봉독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대화에서는 언어가 큰 역할을 하고 있는데, 말씀 전례에서 언어는 하느님 말씀인 성경에 대한 봉독과 그 성경 말씀을 풀이하는 사제나 부제의 강론이나 훈화, 그리고 이에 화답하는 교우들의 기도와 노래로 규정할 수 있다. 전례 언어는 전례의 본질적 요소일 뿐 아니라 전례의 기본 구조를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의 화답으로 만드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사실 성경 봉독과 강론은 이미 구약 유다교 예배의 기본 형태다. 무엇보다도 안식일에 거행되는 시나고가 예배는 율법서와 예언서의 봉독과 강론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는 성경을 미사 중에, 특히 말씀 전례 중에 봉독하는 예식을 받아들였다. 초대 교회에서는 미사 전례 중 독서로 성경 외에도 치명록이나 주교들의 서한들도 읽었지만 중세 초기부터 성경만 읽도록 해왔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까지 공식 전례 언어는 라틴어였지만 공의회 이후에는 모국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런 개방은 전례에서 성경 봉독을 더욱 풍요롭고 더욱 다양하고 더욱 적합하게 해준다.

      ”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6 하느님 말씀, 마음에 녹이다”

      독서(하느님 말씀)

      조학 균 신부(예수회, 전례학 박사)

      말씀 전례의 핵심인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독서는 대축일과 주일에는 세 가지 독서가 봉독된다. 첫째 독서는 구약에서, 둘째 독서는 사도들의 편지나 사도행전 및 묵시록에서, 그리고 셋째 독서는 복음에서 선택한다. 평일에는 두 가지 독서가 봉독되는데 첫 번째 독서는 구약을 포함한 신약에서 복음을 제외한 부분에서 선택을 하고 둘째 독서에서는 복음을 선택한다. 주일이나 대축일 미사의 독서는 3년을 주기로 이뤄져 있으며, 평일 미사의 독서는 2년 주기로 이뤄져 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전례 개혁의 일환으로 성서학ㆍ전례학 분야 전문가들의 협조를 얻어 주일 미사를 위해 3년 주기로 독서를 배분하고, 평일 미사를 위해서는 이와 병행하여 2년을 주기로 독서를 배분했다.
       주일과 축일에는 신자들이 많이 참여하기에 이 미사 때의 독서는 성경의 주요 부분을 총망라하고 있다. 복음 배분에 있어서, 연중 주일에는 공관복음을 기준으로 ‘가’해에는 마태오복음, ‘나’해에는 마르코복음, ‘다’해에는 루카복음을 낭독한다. 이중 ‘나’해에 선택하는 마르코복음은 분량이 짧기 때문에 연중 17~21주일에는 요한복음으로 보충하고 있다. 연중 시기가 아닌 특수 시기에는 요한복음이 봉독된다.
       평 일 독서는 주일과 축일의 보충 독서로서 주일과 축일에 선택하지 않은 나머지 부분들을 선택해 봉독하게 된다. 주일 독서와 달리, 평일 독서에서는 독서 내용과 복음 내용 간의 연관성이나 조화가 고려되지 않은 채 배분된다.
       
       성경 말씀이 봉독될 때, 공동체는 하느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성경의 한 장면, 한 장면의 신비와 장소를 상기함으로써 하느님께서 공동체의 면전에 말씀하시는 것이라 생각을 하면서 듣는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의에 따라 로마미사 전례서 총지침(29항)에서는 “성서가 봉독될 때에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며 말씀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선포하신다”는 의미를 지니며 무엇보다도 “전례의 중요한 요소인 하느님 말씀을 봉독할 때 존경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이 봉독될 때는 회중이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이지, 성경을 눈으로 보거나 공동독서를 하는 것이 아니다. 미사 참례하는 것은 전례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통교하려는 것이지, 성서 교육을 위해 참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통교를 위해서는 독서자가 봉독하는 성경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려고 경청해야 하며, 경청한 후에는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응답을 드려야 한다. 성경을 눈으로 읽어 나가면, 듣기에 앞서 먼저 성경 내용을 개인적 이성으로 판단할 우려가 있다. 성경을 눈으로 읽어나갈 때 독서자의 말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하느님 말씀에 대해서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이성으로 받아들여 논리적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서 마음으로부터 믿기 때문에 성경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이지, 결코 성경을 온전히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 신앙의 특징이다.

      “[조학균 신부의 미사이야기]7 독서를 하러 갈 때 어디에 절을 하나?”

      전 례 중심자리 ‘제대’ 향해

       미사 전례에 참여하는 많은 교우들이 혼란을 갖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독서하러 갈 때 어디에 절을 하느냐 하는 문제다. 교우들은 제대와 감실, 독서대 그리고 주례 사제 중 어디를 향해 절을 해야 하는지 의문을 갖는다. 물론 저마다 합당한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교회 가르침을 말하자면 미사의 중심인 ‘제대를 향해 절을 해야 한다’가 정답이다.
       
       제대의 의미
       제대는 제물 봉헌과 전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봉헌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장소이며, 그리스도인들을 당신 식탁으로 초대하는 감사제의 중심이다. 제대는 미사전례를 거행할 때, 특히 성찬례 때,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거룩한(聖) 변화의 장소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제대의 실제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제물이 되신 장소이자 제자들과 최후 만찬을 드신 식탁이다. 성찬례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최후 만찬을 재현하고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를 건축할 때에 제대는 동쪽이나 동쪽에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동쪽은 새 날의 시작을 알리는 태양이 뜨는 방향이고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대 위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점이자 원천인 성찬례가 거행되기에 교회는 제대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본다. 이로써 제대는 예수님께 대한 추억을 되살리는 하나의 상징물, 파스카 신비를 연상시키는 기념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당을 축성하는 예식 때 가장 중심을 이루는 것은 제대 축성이고, 성당이 허물어진 후 그 자리를 보존할 때도 유독 제대가 있던 자리를 신경 써서 보존하는 것이다.
       
        성당이 성찬례를 거행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요, 또 그 성찬례가 이루어지는 곳이 제대인 까닭에 성당의 중심은 언제나 제대임을 알 수 있다. 초기 교회에서 미사 전례에 참여하는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제대였으며, 성당을 건축할 때 가장 신경을 쓴 것도 제대였다. 그리고 감실은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었기에, 제대 위치를 결정한 후에 감실 위치를 결정했다.
       성체 를 모시는 감실은 성당의 어느 곳이든 상관없이 자리를 잡았으며, 16세기 이후에야 제대 위 또는 제대와 가까운 곳에 감실을 모시게 됐다. 제대를 장식하기 위한 꽃, 초, 십자가를 위한 자리도 16세기 이후에나 언급됐다는 사실에서 교회 건축과 미사 전례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고려한 것은 제대이였음을 알 수 있다.
       
       감실 앞에 앉는 것은 파스카 신비를 묵상하기 위함이지만, 제대는 바로 그러한 파스카 신비의 상징 자체이다. 그러므로 미사 전례 안에서는 언제나 제대가 중심 자리에 있어야 한다. 물론 감실 자체를 무시하라는 것은 아니다. 감실 안에 모셔진 성체를 통해 우리는 여전히 파스카 신비를 묵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실 때문에 제대의 중요성이 감소돼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감실 위치를 현명하게 배치해야 한다.

      “[조학 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8 감실”

      파스카 신비를 묵상하는 작은 방

      ‘감실’은 본래 도교와 불교에서 사용되던 용어다. 사당 안에 신주(神主)나 부처상 등을 모셔두는 장(欌)을 가리키는 말인데,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용어를 받아들여 예수님 몸인 성체를 모셔두는 작은 방을 감실이라 부른다.
       
       감실의 의미와 위치
       교회에서 감실의 위치와 활용에 대한 정확한 문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3세기 중엽 죽기 직전에 있던 어떤 신자가 한 젊은 사람이 사제에게서 받아온 성체를 영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대략 짐작할 수 있다. 7~8세기에 이르러 성체가 제의방에 보관되고 있었다는 일부 교회 문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축성한 빵을 쉽게 보관하는 곳으로 제의방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13세기에 들어오면서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보다 실제적이고 벽면에 붙은 감실이 등장하게 된다. 안전성을 고려한 이 벽면 감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후로 교회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예술적이고, 또 신자들에게 더 가까이 보이기 위해 벽에서 분리시켜 “가능하면 성당 안이 아니라 따로 경당을 만들어 거기에 감실을” 자리잡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 지만 현실적으로 공간 확보가 어렵다거나 어떤 특별한 사정으로 경당을 마련할 수 없을 때 차선책으로 성당 안의 뛰어난 자리에 모시라고 교도권은 말하고 있다. 여기서 “뛰어난 자리”가 성당의 중앙 위치, 즉 제대의 존엄성을 해치는 자리가 아님은 분명하며, 제대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성체의 존엄성을 확보할 수 있는, 조용하면서 기도 분위기를 돋울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감실은 성체를 모셔두는 자리다. 성체를 따로 모시는 까닭은 병자에게, 어떤 사정으로 인해 미사에 참례하지 못하는 신자에게 성체를 영해 주기 위해서이다. 나아가 미사 때 신자들을 위해 충분한 제병을 준비하지 못한 경우를 대비해, 또한 미사 때 남은 성체를 보관하기 위해서도 감실이 이용된다.
       물론 중세 이후 내려온 관습에 따라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흠숭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하지만 감실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제대 위에서 거행되는 성찬례와 그로써 드러내고자 하는 파스카 신비를 신자들에게 상기시키는 데 그 본래 목적이 있다. 이 말을 달리 하면, 제대와 연계되지 않은 감실, 성찬례와 상관없는 감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감실이 신자들의 눈을 제대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면 그것은 감실의 본래 존재 목적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감실 앞에 앉는 것은 파스카 신비를 묵상하기 위함이다. 성당 구조는 신자들의 신앙을 올바로 이끌 수 있도록 잘 준비돼야 하며, 제대와 감실 사이에서 혼동을 겪지 않도록 감실을 위한 공간을 따로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감실이 있는 경당을 제대 근처에 마련해 사제가 쉽게 감실 경당에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면 미사 중 성체를 가지러 가거나 남은 성체를 다시 갖다 놓을 때 불편을 겪지 않을 것이며, 신자들은 성당 안의 넓은 공간보다는 아늑한 분위기의 경당에서 더 쉽게 성체조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 9-독서대”

      하느님 말씀 선포되는 거룩한 곳

      독서대<사 진>는 단어가 말하는 그 의미대로 독서하는 자리로서, 하느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다. 독서대에서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을 교우들은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경청한다. 독서대의 중요성은 교회 지침서에서도 강조하고 있으며, 그 역사와 분명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독서대가 전례 안에서 올바르게 자리 잡도록 해야 할 것이다.
       ”백성과 함께 드리는 미사에서 성경 봉독은 언제나 독서대에서 한다.” 따라서 제대나 해설대에서 하지 않도록 한다. 독서대는 말씀의 식탁으로서 성당 안에서 제대와 함께 전례적으로 가장 중심이 되는 자리이다(간추린 미사 전례 지침, p.18).
       독서대는 무엇보다도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장소이므로 복음을 포함한 독서는 반드시 독서대에서 봉독돼야 하고, 화답송과 보편지향기도도 독서대에서 행하기를 적극 권고하고 있다.
       독서대는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거룩한 장소이기에 성당 안에서 말씀의 품위에 맞갖은 특별한 위치, 곧 높고 고상한 곳에 설치돼야 한다. 높고 고상한 곳이란 모든 교우들이 쉽게 볼 수 있고, 거기서 선포되는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장소는 성당의 중심지에 설치돼 있는 제대 가까운 곳이 좋다.
       독서대의 재료는 제대와 조화를 이루는 고상하고 튼튼한 재료가 좋으며, 독서대 크기와 모양은 성당의 구조에 따라 설치하되 제대 크기와 모양과 균형 있는 짝을 이루게 한다.
       따라서 독서대는 제대와 같은 존경과 품위를 표시하기 위해 만들며, 해설대와 분명히 구별할 수 있도록 제작되고 배치돼야 한다. 또한 독서대는 여러 전례를 거행하는 데에 적합하도록 주변에 충분한 공간이 마련돼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여러 명의 봉사자가 독서대 주위를 둘러서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독서대 모양은 독서자가 편안하게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기 쉽게 제작돼야 한다. 로마 미사 전례서(독서와 복음이 수록된 책)를 펼쳐놓기 쉽도록 요한 복음사가의 상징인 독수리형상으로 만들어진 독서대를 예로 들 수 있다.
       제대와 같이 독서대도 바닥에 고정시킨 독서대가 바람직스러우나, 이동 독서대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 용도나 미사 때의 의미로 보아 독서대는 하나만 설치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독서대는 제대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백성의 모임에서 구원의 신비를 가져다주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며, 성부께 완전한 제사를 드리시는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하느님 말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독서대의 본 기능은 미사에 참여한 모든 이에게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음향 시설에도 특별히 유의하여 성당에 있는 모든 이가 사제나 봉사자들이 바치는 기도와 독서자들이 봉독하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제의 강론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명확히 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한 점을 감안하여 성당을 신축하거나 개축할 때에는 단지 독서대의 크기, 모양, 장식 등에만 관심을 집중하지 말고 방음 설비나 시설에도 반드시 신경을 써서 복음 선포에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한다.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10 독서

      어느 수녀님이 본당 전교수녀로 있을 때 경험한 어려움 중 하나가 독서자 선정이라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나이도 있으시고 신앙생활도 열심하신 어느 자매님에게 주일날 독서를 부탁했더니 극구 사양하셔서, 수녀님은 ‘이 자매님이 참 겸손도 하시구나’ 생각하고 아무튼 꼭 하셔야 한다고 부탁을 하자 나중에는 말소리가 높아지며 서로가 서먹서먹한 분위기까지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그때 자신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고, 무슨 연유로 그렇게 그 자매가 화를 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하느님 말씀을 자신 있고 신념에 차서 선포한다는 것은 강심장의 소유자가 아니면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많은 사람 앞에서(가족이나 알고 있는 신자들 앞에서 ) 마이크를 앞에 두고 자신 있게 하느님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어떤 분들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독서를 해 나가시는 분들도 있지만, 처음 하시는 분들에게는 어렵다.
       어려워하는 분들은 집에서 여러 번 독서 내용을 숙지한 후 가족 앞에서 한번 연습을 해 보면 한결 좋아질 것이다. 또 ‘선택된 독서자’라는 자부심을 갖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독서자에게는 독서를 부탁하기 전에 독서자의 임무나 자격에 대해 설명해 주면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두려움은 안에서 나오는 것이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말씀 전례에서 성경을 읽어, 전례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깨닫도록 하는 사람을 독서자라고 한다. 성경이란 글자 그대로 거룩한 말씀이며, 거룩한 책을 읽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어야 한다. 또한 독서자는 성경 본문을 정독하며, 성경 말씀을 전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독서와 복음의 상관관계를 잘 이해하고, 하느님 말씀의 참뜻을 깨닫고 전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올바른 독서를 하기 위해서 독서자는 말씀을 봉독 전에 충분히 읽고 이해해야 하며, 자신감을 갖고서 하느님 말씀 선포자 자격으로 당당하게 임해야 한다. 회중들 앞에서 자신감이 결여돼 떨리는 목소리로 봉독해 나간다면 듣는 이들은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기에, 독서자들은 임무를 수행할 참된 자질을 갖춰야 하며 빈틈없는 준비를 해야 한다. 신자들이 거룩한 독서를 들으면서 성경에 대해 맛들이며 마음속에 살아있는 감동을 키워 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기 때문이다.
       독서직을 받은 독서자가 없을 경우 다른 평신도에게 성경 봉독을 수행할 임무를 맡길 수 있다. 하지만 알맞은 독서자가 없을 때는 주례 사제 자신이 독서를 낭송할 수도 있다. 독서자는 독서 후에 화답송 낭송자가 따로 없을 경우에 화답송을 낭송한다. 독서자는 평신도일지라도 미사 집전 중에 고유 직무를 가지고 있으므로 자기보다 높은 계층의 직무 수행자가 있더라도 스스로 자기 고유의 직무를 수행한다.
       신자들이 하느님 말씀을 듣고서 성경에 대한 감미로움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하려면, 독서자들은 비록 독서직을 받지 않았지만 성경 봉독의 소양을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여성에게도 복음 전 독서들을 봉독하고 보편 지향 기도를 하도록 허락하고 있다. 교회는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임무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 ]11 미사보”

      신 앙인으로 정숙하고 겸손한 몸가짐의 표현

      여성 그리스도인들은 미사에 참여할 때 머리에 미사보(흰색이 주종을 이루지만 연한 살색이나 검정색도 있다)를 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필자는 미사를 봉헌할 때 여자교우들이 미사보를 쓰는 모습이 개인적으로 아름답다는 말을 자주한다.
       하지만 교회 내 여성차별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으며, 외국에서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미사보를 왜 한국교회만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미사보 사용에 대해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름답다고 표현한 말에 여성차별이라는 답하는 것에 당황한 적도 있었다.
       외국에서 미사보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좋으면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외국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 한국 신자들(주로 성지순례단)이 미사보를 쓰는 것에 대해 현지인들도 좋아하는 모습을 많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미사보 사용이 의무인 것은 당연히 아니다. 교회법에 ‘미사에 참례하는 여성은 미사보를 반드시 써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따라서 미사보를 쓰지 않고 미사에 참례했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거나 분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전례 토착화 입장에서 볼 때 미사보 사용은 토착화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또 새 영세자들에게 예쁜 미사보를 선물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미사보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면 사용에 대한 선택은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사보의 의미
       여성이 머리를 가리는(베일) 관습은 구약 시대(창세 24, 65)에는 자신이 미혼임을 상징했다. 하지만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남자 역시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자신의 얼굴을 가렸음을 알 수 있다(탈출 3, 6, 1열왕 19, 13).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여성 신자들이 교회 공식 예절 때 머리를 가리는 관습이 시작된 것은 사도 바오로가 고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11장)에서 이를 공적으로 언급하면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바오로는 교회 공식 예절에 참여할 때 여성들의 머리를 가리라고 했는데, 이는 당시 풍습일 뿐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신앙의 의미는 아니다.
       사실 여인의 머리는 남편의 영광으로 인정되며, 머리카락은 세속적 사치로 여겨졌기에 하느님이 계시는 성소(聖所)에서는 머리를 가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신앙인으로서 소박한 생활과 정숙한 몸가짐의 표현으로 미사 전례 때 미사보를 사용하게 됐다. 미사보의 흰 색상은 세례성사를 통해 깨끗해졌다는 순결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화려하게 치장된 머리를 가리는 것은 정숙함과 겸손함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현재 수도자들이 쓰는 베일은 3세기께부터 그리스도와 맺은 영적 혼인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주교들이 베일을 축성하여 동정녀들에게 나눠 준 데서 유래한다. 다양한 형태로 사용하고 있는 수도자들의 베일은 그리스도의 정배로서 세속적 사치와 욕망, 허영 등을 끊어버리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가치를 위해 이 세상의 가치에 대해 포기하고 죽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조학균 신부의 미사이야기]12 화답송 및 복음 환호송”

      모 두 일어나 주님 환영하며 알렐루야

      미사전례에서 1독서가 끝나면 공동체는 하느님 말씀에 화답하는 노래를 부른다. 한때는 화답송을 층계송이라고 했는데, 이는 하느님 말씀을 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계단(gradus)에 앉아 경청하다가 시편으로 구성된 노래를 불렀다는 것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화답송 때 부르는 시편 선택은 전례 주년에 맞춰 독서와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하느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기도로 화답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에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화답송을 준비해야 한다. 화답송을 노래로 하기 위해 성가대의 아름다운 화음을 통해 표현하는 것도 좋지만, 적어도 후렴 부분이라도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해설자가 “화답송”이라고 말하면서 공동체를 유도할 필요는 없다.
        화답송을 성가대가 따로 노래하지 않는다면, 독서자나 화답송을 노래하는 다른 봉사자가 독서대에서 노래하거나 낭송하는 것이 좋다. 또한 화답송을 노래하거나, 낭송할 때 너무 긴 시간이 소요돼 지루하다는 생각을 공동체가 느끼게 하거나, 성가대와 함께 노래로 화답송을 하는 경우에 너무 어려운 곡을 선택해 공동체가 소외되는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복음이 봉독되기 전에 공동체는 복음 환호송인 알렐루야(alleluia)를 노래한다. 복음 환호송은 히브리말 “hallelu-jah”에서 유래하는데, “주님을 찬양하라”는 의미를 갖는다. 개신교에서는 히브리어 그대로 “할렐루야”라고 하나, 당시 그리스어 “알렐루야”와 혼동해서 사용되었고, 라틴어로도 “알렐루야”로 발음하므로 가톨릭에서는 “알렐루야”로 사용하고 있다. 가톨릭에서는 “알렐루야”, 개신교에서는 “할렐루야” 하면서 어떤 것이 맞는가 하는 논쟁은 단지 발음상에서 오는 차이일 뿐이지, 의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화 답송이 이미 들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공동체의 응답이라면, 복음 환호송은 앞으로 듣게 될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이 우리들과 함께 현존하심에 대한 공동체의 환호이다. 그러기에 독서와 화답송은 앉아서 듣고 노래했지만, 복음 환호송과 복음은 공동체가 일어서서 “주님을 환영하고 찬양하며, 그분에 대한 믿음을 고백”(간추린 미사 전례지침)하는 것이며, “복음 환호송은 활력이 넘치는 리듬과 뚜렷하고 확실한 선율로 힘있게 불러야 한다”(한국 천주교 성음악 지침).
       결국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기 위한 기쁨이 충만한 순간에, 어떻게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때는 복음 환호송을 노래할 때 그레고리오 성가에 맞춰 장엄하고 느리게 노래했지만, 미사전례 안에서의 복음 환호송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리듬이 빠르고 쉽게 부를 수 있는 곡들이 작곡돼 보급되고 있다.
       사순시기에는 알렐루야 대신 가)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나)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 받으소서. 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 받으소서. 중 택일하여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위령미사일 경우 복음 환호송이 망자에게 있어 주님 안에서 부활하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표현하고 있으므로 사목적 판단에 의해 결정하는 것이 좋다.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13 복음 봉독”

      말씀 전례의 화룡정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는 복음 봉독은 말씀 전례의 정점이다. 복음 환호송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 일어서서 말씀 선포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복음 봉독을 하는 사제(주례자가 주교일 경우)나 부제는 주례자에게 나아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축복을 청한다. 주례자는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계시어 그대가 복음을 합당하고 충실하게 선포하기를 빕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면 봉독하는 이는 “아멘”이라고 응답한다.
        장엄미사를 거행할 경우에는 봉독자는 복음서를 조금 높이 받들어 공동체가 볼 수 있도록 하며, 불을 켠 초 복사와 향로를 든 복사를 앞세우고 독서대에 가서 분향(세 번 분향)하고 복음을 선포하게 된다(간추린 미사전례 지침). 복음 선포자는 복음을 제대에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대에서 선포하는 것임을 잊지 않도록 한다. 그리고 불을 켠 초의 의미는 인간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시는 분에 대한 예의로서, 어둠을 몰아내시는 말씀과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하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독서대에서 복음을 봉독하는 사제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회중에게 인사할 때 손을 모으고 한다(간추린 미사전례 지침). 그리고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라고 말하면 이어서 모든 이들이 “주님 영광받으소서”하면서 복음서(봉독자만)와 이마, 입술, 가슴에 작은 십자를 긋는다-분향의 예를 바칠 경우는 복음 봉독 전에 한다. 강복의 의미를 갖는 작은 십자성호는 11세기 이후에 나타난다. 사실 가톨릭에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분들이나, 예비신자들은 경배하면서 십자성호를 긋는 행위를 잘 따라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주변의 형제자매들이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면 아주 고맙게 여기며 복음 말씀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복음을 봉독하는 사제는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하지만 힘찬 기운을 갖고서 복음을 읽어 나간다. 복음은 분명한 발음으로 미사전례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쉽게 그날 복음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읽어 나가야 하며, 강론에 필요한 부분에는 강조하면서 읽어 나가지만, 연극대사를 읽어 나가듯 개인감정을 드러내면서 읽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복음을 읽고 난 후에 사제는 분명한 목소리로 그리고 힘찬 목소리로 “주님의 말씀입니다”라고 선포하고, 공동체는 “그리스도님 찬미 받으소서”라고 고백한다.
       사제는 성사를 집전할 때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선포할 때도 그리스도의 대리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말씀 전례에 참석하는 공동체는 사제의 힘찬 복음 선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삶으로 증거하려는 결심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복음이 선포되는 동안에 공동체는 독서 때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보기보다는 사제가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집중해야 한다.
       사제는 복음을 봉독한 후에 복음서에 친구하거나 경배하면서 “이 복음 말씀으로 저희 죄를 씻어 주소서”하고 기도한다.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14 강론”

      조 학균 신부(예수회, 전례학 박사)

      미사 전례는 모든 부분이 매끄럽게 연결돼 미사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편안하고 쉽게 하느님을 만나게 해주어 하느님을 흠숭하고 자신의 성화를 위해 힘쓰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복음 봉독이 끝난 후 사제가 하는 강론의 효과는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직접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성장시키는” 사제 강론은 미사 맛을 느끼게 해주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본당 신부의 강론에 대해 좋게 평가하면서 본당 신부를 자랑하는 신자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이는 그 신부의 강론이 그만큼 신자들 생활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강론은 거룩한 미사나 그와 유사한 전례의 거행에 속하는데, 집전 사제나 위임된 공동집전 사제가 강론할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부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평신도는 강론할 수 없다”(구원의 성사 64항).
       결국 강론은 사제 몫이다. 잘 준비한 강론은 사제 생활에도 도움이 된다. 충분한 기도로써 준비한 강론은 그리스도를 통한 삶의 지혜를 주고 신자들의 의식을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모든 사제들이 강론을 하지만 모든 이들을 똑같이 이해시킬 수는 없다. 전례력과 그 날 성경 말씀을 간결하면서도 쉬운 문장과 단어 그리고 예를 들어가며 적절히 해설한다면 강론을 듣는 이들은 그리스도와 친숙한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강론을 사제 자질에만 두고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신자들 입장에서 보면 강론을 잘하는 사제가 좋지만, 사제 입장에서는 강론을 경청하고 반응을 보이는 신자들을 볼 때 힘이 솟는 법이다. 열심히 준비한 내용을 독서대에서 강론할 때 신자들이 주보를 보거나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사제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영적 양식을 제공해 주는 신분으로서의 신원의식을 상실하곤 한다.
       필자가 로마에서 유학하던 시절, 강론할 때 아무리 잘 준비를 해도 언어 한계 때문에 의사전달이 잘 되지 않곤 했다. 어느날 열심히 경청하던 분이 오셔서 용기를 주셨다. 강론이 무척 좋았는데, 내용이 길지 않고 필요한 말만 해주니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결국 강론은 ①너무 길어서는 안 된다. (주일 강론은 7~10분, 평일 강론은 4~6분이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②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나누는 장소이며 시간이지 토론의 장이어서는 안 된다. ③ 일상적 언어 사용을 통해 묵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줘야 좋은 강론이다. ④ 원고를 읽어 나가는 형식이 아니라, 대화를 하듯이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좋다. ⑤ 침묵 시간을 통해 강론을 듣는 신자들 마음 속에 하느님 말씀이 새겨지고 자라날 수 있도록 배려해 줘야 한다.
       때에 따라서, 사목적 배려에서 평신도가 강론을 할 수 있지만, 강론에 관한 원칙을 지키는 것이 전례의 흐름에 부합한다. 강론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규범을 다루기 때문이며, 그 날의 일용한 영적 양식이기 때문이다.

      ”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15 신앙고백”

      조학균 신부(예수회, 전례학 박사)

      성경 봉독과 강론을 통해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인 회중은, 하느님 사랑과 자비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흠숭으로 인해 닫힌 마음을 열고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신앙고백 내용은 가톨릭교회 전통 안에서 축약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문이다.
       미사에 신앙고백문을 도입한 시기는 5세기 후반(안티오키아 교회)으로 동방교회에서 먼저 도입했다. 6세기 말 스페인(톨레도 시노드, 589년)을 시작으로 라틴교회에 퍼졌으며, 11세기 초에 이르러 로마 전례에 도입된다.
       초대교회 에서 신경을 도입한 동기는 그리스도의 천주성을 부인하던 아리아니즘 이단을 막고 믿음의 기본 교리를 확고히 심어 주기 위함이었다. 신앙고백문에는 니체아 신경(니체아ㆍ콘스탄티노플 신경)과 사도신경 두 종류와 더불어 아타나시아 신경, 트렌토신경 등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초기교회에서는 신앙고백을 주일이나 대축일 미사 중에 하지 않고 특정한 날(주일과 몇몇 축일, 신경의 내용과 관련된 예수 성탄부터 성령강림축일 사이, 성모님 축일 및 사도축일)에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국 교회는 니체아 신경보다 사도신경을 사용하고 있지만 사도좌나 서구 교회 대부분은 니체아 신경을 사용하고 있다. 보편교회는 미사의 공식 신앙고백문에 대해서 니체아 신경으로 정하고 있으나, 1967년 주교 시노드의 건의에 따라 지역교회의 판단에 따른 결정을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니체아 신경이 단지 길다는 이유로 사도신경을 선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편교회는 지적하고 있다.
       사도신경은 니체아신경을 보다 간단하게 그리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로마미사전례의 공식 신앙고백문이다. 사도들이 전해주었다는 점에서 사도신경이라고 부르는 이 신앙고백문의 구성은 단순하면서 지극히 종교적 특색을 갖고 있다.
       사도신경은 초세기 중엽부터 그리스도 신앙의 골자가 되는 조항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예비신자들을 위한 내용들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에 대한 신앙과 그리스도의 강생 구속, 부활, 승천, 재림에 대한 것과 교회와 죄 사함과 육신 부활과 영생에 대한 신앙고백이 주요 내용이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심으로 믿고, 고백해야 하는 기본적 신학적 내용들로만 이뤄져 있다.
       전통적 교리 내용으로 이뤄진 사도신경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를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기본적이며, 믿는 이들이 알아 둬야 할 교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에게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신앙고백문의 형식은 다른 기도문과는 달리 교송으로 바치지 않는다. 사제와 회중이 함께 고백하는데, 본인 스스로가 신앙을 고백한다는 의미가 있다. 즉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신앙의 진리를 실현하겠다는 고백이다. 신앙고백 후에는 강한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잔치인 성찬례에 참여하기에, 파스카 신비인 성찬례 잔치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신앙을 점검, 강화, 고백하는 순간이 신앙고백인 것이다.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16 보편지향기도”

      조학균 신부(예수회, 전례학박사)

      미사가 하느님과 그리스도인들간 대화의 장이라면, 기도는 대화 그 자체이다. 미사 중 기도 내용은 하느님에게 간청하면서 모든 이들을 위한 보편적 선을 지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본적으로 미사 전례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전례 봉사자들이 회중을 대신해 바치는 기도에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라는 말로 참여하고 있으며, 자유로운 보편지향기도를 통해 직접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다. 보편지향기도는 모든 이들의 지향을 모아 특별한 기도 형식을 갖지 않고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말로써 미사전례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다.
        하느님과 순수한 대화를 통해, 그리고 강론을 통해 알게 된 하느님 뜻에 응답하기 위해 성령의 도움으로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는 것이다. 보편지향기도를 바치는 기도자들은 독서자들과 같이 경건한 마음과 공동체를 대신한다는 마음으로, 차분하고 분명한 발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미사전례 안에서 기도가 준비돼 있지 않다면 준비된 식탁에 음식이 없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들이 보편지향기도라고 부르는 기도는 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 말씀에 대답하기 위한 기도이며, 신앙에 따라 사는 데 필요한 은혜를 청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으며,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하신 말씀에 대해 기도로 응답”(전례헌장 33항)함으로써 공동체가 드리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보편지향기도의 특징은 개인이 필요로 하는 것을 청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적이고 공동체를 위하고 공동체에 의존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하느님 은총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있는 공동체를 위한 기도”인 것이다. 말씀 전례를 종결하고 성찬 전례를 이어주는 보편지향기도는 인류 구원을 위한 예비 봉헌이며, 인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공동체의 이름으로 결합되어 한 공동체를 형성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보편지향기도는 지향을 두지만 기도를 바치는 표현 방식이 자유롭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즉 보편지향기도는 4가지 지향을 갖는데, △모든 교회를 위한 기도 △전 인류를 위한 기도 △모든 차원의 공동체를 위한 기도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를 위한 기도 등으로 구성된다. 미사전례에 있어서 신자들은 주어진 일정한 양식에 의해 준비된 교회 기도문에 충실하게 공동체와 함께 표현을 하지만, 보편지향기도를 통해 공동체의 기도 속에서 자신의 기도를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
       보편지향기도는 신학적 의미를 풍부히 담고 있는 형식화한 교회 기도문이 아니다. 자신의 신앙과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지향하고 청해야 할 것을 학문적이거나 문학적 표현이 아닌 생활의 언어로 정리해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함으로써 공동체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기도다.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 ]17 성찬 전례”

      조 학균 신부(예수회, 전례학 박사)

      오래 전에 어떤 신자분이 개인 사정이 있어서 말씀 전례가 끝나고 성찬 전례부터 참여하면서 영성체를 했는데, 미사에 참여한 것으로 생각해도 되느냐고 물어왔다. 그리고 그분은 그날 성경을 전날 다 읽었고 기도 역시 하고 왔다고 했다. 미사는 크게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의 구조로 돼 있다. 그런데 한 쪽을 생략한 채 다른 한 쪽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집을 지탱하는 기둥이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성찬 전례(=성찬례)를 고찰해 보면, 미사를 주례하는 사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최후 만찬을 하신 것을 재현하면서 빵과 포도주를 들고(예물 준비), 감사기도를 바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을 기념하고,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분배(영성체)함으로써 주님 안에서 공동체의 일치를 이루고 상호간 친교를 이루는 예식이다.
       이러한 성찬례는 구약의 파스카를 통해 이해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오면서 양의 피를 상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바른 예식을 통해 죽음을 면한 파스카(Pasqua, 탈출 12, 21-28) 그리고 홍해를 건너오면서 겪은 파스카(pass over, 혹 과월절)를 기념하는 사건이 이스라엘 예절 안에 정착됐다.
       또 노예 생활에서 자유인 생활로 바뀐 이스라엘 백성이 구약의 주님과 거룩한 백성, 하느님 왕국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계약을 맺은 것을 기념했다. 이런 역사적 가치를 지닌 구약의 파스카 계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으로써, 그리고 당신 몸과 피를 봉헌하심으로써 새롭게 갱신됨을 교회는 선포하고 있다.
       신약의 파스파 개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 사건 안에서 이해되며,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는 성찬례에서 완벽하게 재현된다. 트렌토공의회(1545~1563)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봉헌하신 것과 같은 희생제물을 교회가 성찬 전례를 통해 똑같이 봉헌하고, 재현하고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
       따라서 성찬 전례를 집전하는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 만찬을 주관해 십자가상 제사를 다시, 지금 이 자리에서(Hic et nunc)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미사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성찬례는 “최후 만찬의 형식과 절차에 따라 구성”돼 있으며, 성찬례 전체의 형식과 구조는 전례헌장의 개정 지침에 따라 미사경본 총지침(72항)에 자세히 설명돼 있다. 성찬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을 기억하고 재현함으로써 구원의 효과가 미사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현실화되고 체험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는 이 성찬례를 ‘신자들의 미사’, ‘봉헌미사’라고 했는데 이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말씀 전례가 끝이 나면 세례를 받지 않은 예비신자들은 자리를 비우고, 세례를 받은 신자들만이 미사, 즉 모임에 남아 성찬예식을 계속 진행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의 십자가상 제사를 재현하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하는 성찬 전례에 대한 교리를 예비신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않았을 상황에서는 불필요한 오해를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18 예물 준비”

      제물 없는 제사가 없듯이, 성찬례 준비 역시 그리스도 성체와 성혈이 될 빵과 포도주를 봉헌해 제대에 준비한다. 성찬례의 의미는 초기 교회에서는 감성적 예물의 제공(offer, offertory)이라는 본래 의미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예식적 의미를 갖는 봉헌(oblation)으로 변하게 된다. 미사에서 제사 형식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초기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정성과 마음을 표시하고자 예물 예식 때 빵이나 포도주를 비롯해 식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봉헌했다. 이렇게 봉헌된 물품들은 성직자 생활을 위해 그리고 공동체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뉘어졌다. 그러다 11세기 이후 화폐 발달로 인해 봉헌하는 예물이 현금으로 바뀐 것이다. 오늘날 봉헌된 예물은 성직자 생활과 교회 운영, 건물 유지 그리고 자선에 사용되고 있다.
       예물을 봉헌하는 행렬은 트렌토공의회 이후 교회 예절에서 사라졌다가 20세기 초 전례 부흥 운동이 일어나면서 교회 내에서 되살리려는 노력으로 이어졌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 미사 전례에서 다시 자리를 잡게 됐다.
       먼저 빵과 포도주를 회중의 대표가 사제에게 봉헌하기 위해 운반하고, 이어서 회중이 헌금을 하는 행렬을 이룬다. 회중의 대표가 빵과 포도주를 봉헌할 때 주례사제는 복사를 대동해 제단으로 오르는 마지막 계단에 서서 이들의 봉헌물을 받아 복사에게 전달하고 인사로 감사 표시를 전한다.
       성찬례를 준비하는 데 봉헌되는 빵은 인류가 생활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양식이다. 그러나 성찬례 때 사용되는 빵은 누룩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참조, 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 320항 : 성찬례 거행에 쓰일 빵은 순수하게 밀가루로 만든 신선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라틴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누룩 안 든 빵이어야 한다).
       이스라엘 문화에서 볼 때 포도주는 삶의 자양분뿐만 아니라, 기쁨과 구원의 매개체로 생각을 하고 있기에 봉헌되는 예물은 특별한 선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일상사에서 수고한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것이고, 중요한 것을 드리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있지만 서양에서 빵은 가장 보편적이고 기본적이며, 필수적인 생활 양식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느님 제단에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는 것은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고 필수적인 것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의미지만, 신학적으로 예물 봉헌은 신자들이 예물과 함께 자신들의 신앙을 봉헌한다는 의미로 해석돼야 한다.
       결국 예물 봉헌은 가장 보편적이며 중요하고 그리고 삶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것들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 규정 및 계약은 성찬례의 예물 봉헌을 통해 인간과 하느님이 맺는 새로운 계약이 된다. 하지만 빵과 포도주를 예물로 바치는 것만으로 성찬례의 본질적 의미가 충분해지는 것이 아니다. 성찬례의 본질적 의미는 빵과 포도주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의 의미가 내포돼야 충만해진다.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19 제대 준비”

      조학균 신부(예수회, 전례학 박사)

      회중의 봉헌 예절이 끝나면 복사는 성찬례를 위해 즉 회중이 봉헌하는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려고 제대를 준비한다. 일선 본당에서는 미사 때 말씀 전례가 끝난 후 따로 제대를 준비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있지만, 사제 서품식과 같은 큰 미사에서는 분리해서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 회중에게서 받은 빵과 포도주가 제대 위에 놓이고 사제는 예물을 위해 준비기도를 한다.

       1) 사제는 제대에 가서 빵이 담긴 성반을 조금 들어 올리고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하고 기도하는데, 미사에 참여해 성체를 받아 모시게 되는 이들에게 회중이 봉헌한 빵이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생명의 양식은 현세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현실적이고 필수적이다. 성변화를 통해 빵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면 그 성체를 받아 모시는 이들에게 현재를 위한 은총의 선물이 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2) 빵을 위한 기도가 끝난 후 부제나 사제는 포도주가 담긴 성작에 물을 조금 따르면서 기도한다. 성작에 물을 섞는 예식은, 날씨가 더운 당시 중근동 지방에서 목동들이 식사 때 많은 양의 포도주를 섭취해 취하는 것을 방지하고, 포도주를 빵과 함께 먹을 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포도주 그대로를 마시지 않고 물을 섞는 풍습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성찬례에서 물을 섞는 상징적 의미는 유다인들의 전통적 생활에 들어 있는 의미보다 신학적으로 재해석된다.
       가) 그리스도의 늑방(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물(요한 19,34)을 암시하고, 여기서 교회와 성사들이 탄생했음을 상징한다.
       나) 포도주와 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을 상징으로 나타낸다.
       다) 현 기도문의 신학적 해석은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인 신자 공동체의 결합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미 섞인 물과 포도주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신자 공동체가 그리스도와 하나의 공동체로 결합됐으니 다시 분리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3) 사제는 성작을 조금 들어 올리며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이 술을 주님께 바치오니 구원의 음료가 되게 하소서”하고 기도하는데, 이때 술은 미사에 참여해 성혈을 받아 모시는 이들에게 구원의 음료가 되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종말론적 의미에서 구원의 음료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예물 준비기도는 이 예물이 미사 전례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현재와 미래를 위해 은혜로운 선물이 되어주기를 간청하는 시간이다. 대축일 미사나 주교님과 함께 하는 미사인 경우 제대와 예물을 향해 향을 피우곤 한다.
       예물 준비기도가 끝난 후 사제는 제대 한쪽으로 가서 손을 씻으며 조용히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하고 기도한다. 이 손 씻는 예식은 정화 의미를 갖기에 불편하다고 해서 혹은 불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생략해서는 안 된다. 주례 사제는 회중을 대표해서 정화 예식을 거행하기 때문이다.

      제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한 사건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장소, 그리스도인들을 당신 식탁으로 초대하는 감사제의 중심이 되는 장소 역할을 한다. 초대 교회는 3세기까지는 제대가 이교도 풍습을 반영한다고 여겨 제대의 필요성에 대해 관심을 쏟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성찬례를 거룩한 장소에 있는 제대 위에서 거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거룩한 장소 밖에는 교회가 규정하는 제대포와 성체포를 깔고 십자가와 촛대를 놓고 성찬례를 거행하도록 하고 있다.
       제대의 신학적 의미는 성찬례 때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성 변화 장소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제물이 되신 장소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만찬식탁을 함께 한 장소라는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미사에서 성찬례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했던 최후 만찬을 재현하며, 반복하는 것이다. 개신교의 빵 나눔 예식은 성찬례의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기억(memory)이라는 점에서 가톨릭 교리와 다르다. 사제는 거룩한 미사마다 봉헌을 통한 성찬례 예식을 반복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기념한다.
       결국 그리스도인에게 제대는 신학적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제대는 항상 거룩한 구조물이며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상징”이며 “주님의 식탁”을 상징하는 감사와 공경의 중심이 되는 장소다.
       성찬례 거행을 위한 제대 준비는 부제(부제가 없을 때는 공동집전 사제)가 한다. 봉헌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기 위해 제병을 성반에 놓고, 포도주를 담은 성작에 물을 조금 넣어 주례사제에게 준다.
       또 제대를 꾸미는 데 있어서 준비해야 할 것은 제대를 덮을 흰 천과 촛불이 제대 위나 제대 가까운 곳에 자리잡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촛불은 존경과 축제의 표지이기에 모든 전례 행위에 필요하다. 그러나 촛불이 회중이 제대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나 제대 위에 놓인 것들을 쉽게 바라보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미사 경본 총 지침 307항).
       제대위에 놓이는 초의 수는 전례력에서 지시하는 전례일 등급 순위에 따른다(대축일이나 의무 축일 미사 때는 6개, 주일이나 고유 축일 때는 4개, 그 외 평일에는 2개를 놓는다. 단 교구장 주교가 집전한다면 7개의 초를 준비한다).
       십자고상은 일반적으로 제대 뒤에 자리잡아 회중들이 쉽게 십자고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데, 십자고상이 하나일 경우는 십자고상이 회중을 향하고 두 개일 경우(제대 위에 십자고상을 놓을 경우)에는 사제가 십자고상을 바라볼 수 있게 놓는다. 십자고상은 미사전례 중 회중에게 주님 수난의 구원 업적을 기억시켜 준다.
       제대를 꾸미는 데 있어서 성찬례 예식에 방해가 되는 장식은 삼간다. 제대 주변에 이콘이나 불필요한 예술품(?)을 놓거나, 특히 특별한 날(혼배 혹은 장례미사)의 미사 때 제대를 너무 화려한 꽃으로 장식해서 제대를 바라보는 데 방해가 되거나 성찬례 예식이 보이지 않게 해서는 안 된다.

      2009. 12. 27발행 [1049호]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21 감사송”

      조학균 신부(예수회, 전례학 박사)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중요한 덕목이며 또 인간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고유한 특징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제물이 되시어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신 것을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에 대한 감사를 성찬예식의 재현을 통해 표현하는 것은 당연하다. 감사송의 기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갖고서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성부에게 바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말씀 전례와 성찬례에 의무적으로나 또는 습관적으로만 참석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원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 표시를 미사 전례에서 어떻게 체험하고 표현할 수 있을까? 물론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원은 일상 삶에서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야겠지만 공동체를 통한 신앙 안에서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주례사제가 봉헌된 예물을 받은 후 바치는 감사송은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감사드리는 찬양 기도”이며 사제와 회중의 교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엇보다도 감사송은 함축된 언어를 통해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내용을 배경에 두고 있는 기도로, 공동체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요청한다. 감사송은 파스카 신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인간 구원 행위에 대해 포괄적이고 함축적으로 감사드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감사송은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1) 사제와 회중이 교송으로 함께 참여하는 부분. 무엇보다도 “마음을 드높이”와 “주님께 올립니다”라는 부분에서 사제는 “마음을 드높이”라는 표현을 통해 하느님께 대한 봉헌을 강조한다. (서방에서는 이성이나 머리를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동방에서는 마음을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으며, 그래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마음을 하느님께 봉헌하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또 ‘드높이’라는 표현은 봉헌하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회중은 자신들의 마음, 온 존재를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응답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2) 사제 혼자서 회중에게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찬양하는 부분으로, 교회 전례력에 따라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특히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사업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인간뿐만 아니라 (천사와 성인을 포함한) 모든 창조물들도 기뻐하며 찬양 노래를 해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3) ‘거룩하시도다(Sanctus)’는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듣고 난 후, 기쁨에 찬 환호성으로 사제와 회중이 함께 밝고 기쁘게 노래하는 부분이다. ‘거룩하시도다’를 세 번 외치는 것은 (일부 신자들이 성부ㆍ성자ㆍ성령을 가리킨다고 오해하고 있는데) 그리스 언어의 표현 방식으로 최상급을 나타낸다. 그리고 ‘거룩하시도다’는 모든 회중들이 충만한 기쁨과 찬양을 위한 표현임을 기억하여 밝고 빠른 성가곡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전례 미사중 그레고리오 성가와 현대 성가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갈등할 때에 ‘거룩하시도다’의 참 의미를 알고 있다면, 선택이나 이해에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22 감사기도”
      조학균 신부(예수회, 전례학 박사)

      감사기도의 명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만찬 중에 빵과 포도주잔을 들고 성부께 바치신 감사기도 또는 찬양기도에 기원을 두고 있다. 유다인들의 종교 풍습에서 가장은 빵과 포도주잔을 들고 찬양기도(베라카)를 바치던 것을 초기 교회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찬양기도(에울로기아) 또는 감사기도(에우카리스티아)로 바꿔 사용해 오늘에 이르게 됐다.
       초기 교회에서는 감사기도를 위한 특별한 양식이 없었다. 초기 교회에서 사용하던 성찬예식 양식은 사제가 자유롭게 당시의 복음에 맞춰 감사의 표현 양식을 만들어 사용했다. 말씀 전례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감사를 드리고 찬미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자유로운 감사기도는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만들어 사용했다. 또 즉석에서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고, 미리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제는 미사를 중심으로 신자들이 하느님을 더욱 찬미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더 잘 정리된 감사기도문이 필요하게 됐다. 사실 초기 교회 많은 사제들은 이미 다른 사제들이 만들어 놓은 좋은 감사기도문을 빌려 사용하거나 주교나 선배사제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을 정리하고 보존해 사용했다. 그리하여 훌륭한 감사기도문들은 후세에까지 남아 전해졌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전례쇄신을 통해 교회는 로마 예식만을 고수하지 않고 동방 전통 역시 존중해 종래의 기도문 외에 새로운 세 가지 기도문을 미사경문에 첨가하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 완성된 성찬 감사기도문 표현을 주례사제가 개인적 신념(?)에서 변형해 사용하는 것은 성찬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공동체와의 일치를 강조하는 교회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다.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4개의 성찬 감사기도문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전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전례예식을 통일화하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이 4개의 성찬 감사기도문은 표현은 서로 다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비슷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다양성 안에서 공통적인 것은 성찬기도에서 빠질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거룩한 변화의 말씀만은 통일시켜 놓았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그리고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는 미사전례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효성(ex opere operato, 성사 집전자의 자세나 상태와 무관하게 성사를 집전하는 행위 자체로 성사가 효과를 남)과 인효성(ex opere operantis, 성사에 참여하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효과가 다름)에 대해 적절하게 설명하고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리스도께서 최후만찬 때 하신 말씀을 중요시하고, 사제가 구원의 역사를 전하는 감사기도를 통해 성서적 내용을 근거로 하는 성체성사의 내용과 성 변화의 내용은, 항상 성찬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성찬 감사기도는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변하는 거룩한 변화가 미사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재현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미사 통상문에 나오는 감사기도는 4가지 양식으로 배열돼 있으며, 주례 사제는 전례력에 맞추어 감사기도 가운데 한 가지 양식을 선택한다.
       4가지 양식의 감사기도 중 제1양식은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종래의 로마 감사기도 전문을 중심으로 꾸며져 있다.
        제2양식은 히폴리토의 아나포라(‘올리다’, ‘거양하다’라는 그리스 말에서 유래하는데 사제가 모든 공동체 이름으로 성령에게 청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을 봉헌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는 성찬례의 중심 의미를 지닌다)라 불리는 3세기의 성찬기도를 현대에 맞춘 기도문 양식이다.
       제3양식은 고대 라틴 전례의 전통을 종합해 새로 만든 기도문이며, 제4양식은 동방교회 교부 바실리오의 아나포라에서 취해서 간결하게 정리한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
        감사기도에서 제1양식과 제3양식은 고유한 감사송이 있지 않고, 제2양식은 고유 감사송이 있지만 당일 미사가 대축일 미사인지 기념 미사인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으며, 제4양식은 고유한 양식을 넣어 바꾸거나 교체해서는 사용할 수 없게 돼 있다.
       
        감사기도 양식의 구조를 살펴보면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께 감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모든 감사기도의 첫 구절은 성부께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미사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이들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자신들의 성화를 목적으로 하듯이, 감사기도 역시 성부께 드리는 기도로 시작함으로써 거룩한 성찬례에 참례하게 한다.
       성부께 드리는 기도를 마친 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성령의 오심을 기념한다. 성령의 오심은 봉헌된 예물인 빵과 포도주가 사제의 축성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의 몸과 피가 되는 성변화를 위한 것이다. 이때 사제는 봉헌된 제물에 십자가 표를 하고, 손을 펴서(공동 집전하는 사제는 예물 축성 시 손등이 위로 향하게 한다) 성령의 작용을 청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성부에게로 돌아가, 성부로부터 믿는 이들에게 성령을 보낼 것을 약속한 성서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요한 16,7).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
       감사기도의 가장 중요한 에피클레시스(축성기원)는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으로, 성변화가 에피클레시스를 통한 축성의 말씀으로 완성됨을 교회는 설명하고 있다(참조, 미사경본 총지침 3항).
       감사기도 양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 만찬 예식 안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제사를 재현함으로써 성부와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것이다.
      ——————————————————————————
      제 1양식–인자하신 아버지…….
      ——————————————————————————
      제 2양식–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거룩함의 샘이시옵니다.          
      ——————————————————————————
      제 3양식–거룩하신 아버지 몸소 창조하신 만물이 아버지를 찬미하나이다.       
      ——————————————————————————-
      제 4양식–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위대하시며 지혜와 사랑으로 모든 일을…
      ——————————————————————————–

      2010. 01. 31발행 [1054호]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24 성변화”

      조학균 신부(예수회, 전례학 박사)

      미사전례 특히 성찬례에 참석하는 이들에게 가장 궁금한 것은 어느 때, 어느 순간에 봉헌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거룩하게 변화되는가 하는 것이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도 성변화를 통해 설명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락방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최후 만찬을 거행한 사건을 가톨릭에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제가 지금 이 순간에(Hic et nunc) 예수 그리스도가 거행한 것을 똑같이 재현(re-presentation)하는 반면에 개신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거행한 것을 기억하고 기념(memory)하는 것이다.
       즉 가톨릭에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빵과 포도주가 사제가 읽어 나가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하는 반면, 개신교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그대로 변화 없이 빵과 포도주로 남아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함께 한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변화에서 집전 사제는 우선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며…”(이때 손을 모아 예물 위에 펴 얹는다) 하고 성령 청원기도를 통해 봉헌된 제물이 축성되기를 간구한다. 이어 그리스도께서 하신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그리고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라는 성찬 제정과 축성문의 말씀과 행위로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성변화를 이룬다.
       이때 성찬 제정과 축성문은 마디마디 또렷하게 발음해 미사전례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경건함을 갖게 하면서 아울러 충분히 이해하도록 해줘야 한다.
       빵(혹은 포도주)을 축성하는 순간에 앞서 주례사제는 빵을 조금 들어 올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행위를 설명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기도문을 외운다. 기도문을 외울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편안하고 침착한 마음을 갖고 천천히 읽어 나간다.
       기도문을 외운 후 사제는 빵(혹은 포도주)에서 그리스도의 몸(혹은 피)으로 성변화된 성체를 성찬례에 참여한 모든 회중들이 볼 수 있도록 쳐든 후, 성체를 성반에 내려놓은 다음 허리를 굽혀 절을 한다. 이때 모든 회중들 역시 사제를 따라 모두 절을 한다.
       이때 주례 사제는 성체에 대한 신심에 몰입해 오랜 시간 동안 절을 하는 경우가 없어야 할 것이다. 미사전례는 주례 사제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회중과 함께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봉사자(혹은 복사)는 축성 바로 전에 종소리로 신자들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으며, 아울러 성체와 성혈이 담긴 성작을 높이 들어 보일 때 지방의 풍습에 따라 종을 친다.
       
       봉헌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성변화한 후에 사제는 회중을 향해 “신앙의 신비여!”라고 외친다. 이때 ‘신앙의 신비여!’는 노래로 할 수도 있고, 읽어나갈 수도 있다. 노래로 할 경우에는 주례사제는 미리 생각하고, 성가대와 상의할 것이 있으면 미리 해 놓는 것이 좋다. 하지만 너무 난해한 선곡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교우들은 제시돼 있는 3종류의 양식문 가운데 하나를 골라 응답하며 환호하도록 한다.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25 감사기도”
      조학균 신부(예수회, 전례학 박사)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한 사람일 때는 미사전례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혼란스러운 것이 없지만, 공동 집전을 하는 경우에 어떤 사제가 감사기도를 읽는가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공동 집전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권장하고 있는데, 이는 사제단의 일치된 모습을 보여 주면서 더욱 장엄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때문이다. 또 역할 분담을 통해 사제단의 협력관계를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공동 집전을 하는 경우, 일반적으로 사제가 두 사람일 때는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가 교회를 위한 기도와 더불어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 그리고 산 이들을 위한 부분을 읽게 된다. 세 사람일 경우 주례사제의 오른쪽(일반적으로 선배사제)에 있는 사제가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나머지 부분은 왼쪽에 있는 사제가 바친다. 그리고 그 이상의 사제가 함께 드리는 경우(예를 들면 교회 대축일을 기념하는 미사, 사제서품미사, 수도원 종신서원 미사, 새 사제의 첫 미사 등)에는 지위나 수품 순, 혹은 나이를 고려해서 주례사제의 오른쪽이나 왼쪽에 자리를 잡는다. 단 감사기도를 바치는 사제는 2양식일 경우에는 2명의 사제, 3양식의 감사기도를 선택하는 경우에는 3명의 사제가 도와 기도문을 읽는다.
       감사기도의 선택은 주례사제가 결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미사경본 총 지침」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는 감사기도 제 2양식은 평일과 특별한 환경에서, 제3양식은 주일과 축일에 사용하기를 권장하고 있다(365항 참조). 주일이나 축일에 3양식에 비해 짧다는 이유로 2양식을 선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집전사제는 미사를 집전하는 주교가 여럿일 경우에는 저의 주교(아무…)와 협력 주교들과 같이 뭉뚱그린 말로 표현한다. 특별히 교회를 위한 기도문에 있어서는 주례자가 주교인 경우 기도문 안에서 ‘주님의 일꾼 교황(현 교황은 베네딕토)’과 다음에 오는 주교 부분에서는 ‘주님의 부당한 종인 저와’라고 읽으며, 주교가 자기 교구 밖에서 주례를 할 경우에는 ‘이 교회의 주교인 저희 형제(아무…)와 주님의 부당한 종인 저와’라고 한다(미사경본 총 지침 149항).
       감사기도의 마지막 부분인 마침 영광송(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은 주례자 혼자 바치지만,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면 공동 집전자와 함께 낭송한다. 하지만 공동 집전자는 집전하는 사제의 목소리보다 크게 내지 않는 것이 좋다. 미사 전례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사제들과 함께 낭송하지 않는다(미사경본 총 지침 236항).
       이때 주례사제는 성반과 성작을 들고(공동 집전자와 함께 하는 경우 성반, 성작 혹은 성합을 나누어 든다) 신자들에게 성변화가 완성된 성체와 성혈을 보여준다. 이는 집전사제가 성삼위께 또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한 구원 업적에 대한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환희의 표현이며 성변화가 완성되었음을 선포하는 중요한 순간이다.
       신자들은 ‘아멘’이라는 화답을 통해 성령을 통한 성변화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는데, 성 암브로시오는 이때 신자들의 화답소리를 천둥소리에 비유했다. 신자들은 ‘아멘’을 노래로 화답할 수 있는데, 이때는 짧으면서 밝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로 응답해야 한다.

      평화신문 2010. 02. 14발행 [1056호]
       
      “[조학균 신부 미사 이야기]26 영성체 예식”

      조학균 신부(예수회, 전례학 박사)

      감사기도가 끝나면 영성체 예식으로 들어간다. 영성체 예식은 1) 주님의 기도 권고 2) 주님의 기도 3) 평화예식 4) 빵 쪼갬과 하느님의 어린양 5) 영성체 초대 6) 영성체 7) 영성체 후 기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말씀 전례에서 선포를 통해 하느님 뜻이 우리들에게 전달된다면, 성찬 전례는 눈으로 하느님 뜻을 확인하는 순간이며, 그리스도 몸이 우리 안으로 오셔서 우리와 하나를 이룰 수 있는 순간이다. 감사기도 예식에서 신앙의 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곁으로 오심을 보았다면, 영성체 예식에서 성체를 모심으로써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성체 예식의 첫 번째 부분은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에 사제의 초대 말로 시작된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주님의 기도 권고). 이는 사제가 의미 없이 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를 하는 이가 누구이며, 누가 이 기도를 가르쳐 주었는지 설명하면서(마태 6,9-13; 루카 11,2-4) 미사에 참여한 이들을 거룩한 순간에 초대하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주님의 기도는 단순하게 외우는 기도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여야 한다. 주님의 기도 때 미사를 주례하는 사제나 공동 집전자들은 다 함께 팔을 벌려<사진> 회중과 함께 기도한다(미사 경본 총 지침 237항). 이때 사제가 팔을 벌리며 기도를 하는 자세(본기도를 포함해서)는 나무를 연상하게 한다. 즉 나무와 같은 모습은 항상 하늘을 향하고 있다는 의미로서, 기도가 항상 하느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과 아울러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자세를 의미한다.
       다른 나라 교회에서는 회중이 사제들과 같이 팔을 벌려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경우가 있지만 한국 교회에서는 팔을 벌려 기도를 하기보다 손을 합장한 채로 기도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주님의 기도는 다른 기도와 달리 끝에 ‘아멘’을 하지 않으며, 바로 응답 영광송(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으로 끝맺는다.
       이어 평화예식으로 이어지는데, 평화예식에서 교회는 자신과 인류가족 전체의 평화와 일치를 간청하며, 신자들은 성체를 모시기 전에 교회에서 누리는 일치와 사랑을 드러낸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방법에 대해서는 주교회의가 민족의 문화와 관습에 따라 정한다. 한국 교회에서는 평화의 인사로 가벼운 절이나 가볍게 안음, 손을 맞잡는 동작을 할 수 있다(미사경본 총 지침 82항).
       무엇보다도 빵을 나누기 전에 하는 평화예식은 미사에 참여하는 회중이 평화스러운 마음과 기쁜 마음을 갖고, 공동체 구성원들과 화해함으로써 영성체를 통해 그리스도 몸이 내 몸 안에서 하나 됨을 느끼게 해준다. 영성체 전 공동체와 화해함으로써 온전히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준비를 하는 것은 중요하다.
       미사통상문에서는 평화의 인사를 장례미사 때는 생략할 수 있다고 했지만, 사목자 판단에 맡기라는 것이지 실제로 평화의 인사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출판한 장례예식(시안)에서는 평화의 인사 때 교우들은 서로 목례나 합장, 악수 등으로 알맞게 인사를 나누며 말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미사는 살아있는 이들을 위한 전례여서 평화의 인사는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것이며, 망자가 본향으로 가는 것에 대한 그리움 및 아쉬움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10. 03. 07발행 [1058호]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27 빵 나눔”

      조학균 신부(예수회, 전례학 박사)

      미사에 참례한 이들은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조용하고 벅찬 기쁨이 충만한 상태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 이때 사제는 축성된 빵을 들어 성반에서 쪼개어 그 작은 조각을 성작 안에 넣으며 조용히 기도하는데, 빵을 쪼개는 이유는 빵 나눔을 통해 공동체의 사랑과 일치를 다졌던 유다 풍습에서 유래한다. 사도시대에서는 사제단이 주교를 중심으로 빵을 나눴는데, 빵 나눔을 통해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 예식은 하나인 생명의 빵, 곧 세상 구원을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모시는 영성체에 참여하는 모든 이가 한 몸을 이룬다(1코린 10,17)는 사실을 드러낸다(미사경본 총지침 83항). 빵을 나누는 행위는 단 한 번 미사 중에 이뤄진다. 성찬례가 시작되는 부분, 즉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쪼개어…” 하는 부분에서 빵을 나누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미사 통상문 의미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사제는 축성된 빵을 나눈 후, 작은 조각을 떼어 성작 안에 넣으며 기도한다. 이때 작은 성체 조각을 성작에 넣는 것은 신학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관습적으로 내려온 행위지만, 오늘날에는 구원의 업적에서 주님의 몸과 피의 일치, 곧 살아 계시고 영광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표시한다. 또 양형 성찬의 상징적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빵 나눔을 하는 동안에 회중은 ‘하느님의 어린양’의 기도문을 외우게 되는데, 이 기도는 7세기쯤 동방교회 예식에서 도입했다. 성가대가 노래로 할 수도 있는데, 너무 길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축성된 빵을 쪼개는 동안 반복해서 할 수 있지만 끝 절은 “…평화를 주소서”라는 기도로 끝낸다.
       
       사제는 빵 나눔 후에 손을 모으고 영성체 전 기도를 바치는데 ‘가’ 양식이나 ‘나’ 양식 중 하나를 선택해 조용히 기도한다. 기도가 끝난 후 사제는 쪼개어진 성찬의 빵을 성반이나 성작 위에 들어 신자들에게 보이며 그리스도의 잔치에 참여하도록 초대한다. 축성된 빵 즉 성체를 들어 신자들에게 보이는 이유는 성체가 나누어져 있음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나누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쪼개진 빵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상징한다. 또 신자들에게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나눔이 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베푸신 당신 사랑을 거두지 않으신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성체를 거양할 경우, 성체 높이는 사제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 적당하다. 그 이유는 과거에 제단이 높지 않거나, 제 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 벽을 보면서 미사를 거행했고, 성체를 거양했을 때 신자들이 성체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제는 높이 들어 거양했지만, 오늘날에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제와 신자들은 감실에 모셔둔 성체보다 그 미사에서 축성된 성체를 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자들이 영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현재 거행되는 제사를 통해 지금 이 순간에(Hic et nunc)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성체를 축성해 감실에 보관하는 것 보다 적당량의 성체를 감실에 보관하고,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에게는 매번 축성되는 성체를 영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010. 03. 14발행 [1059호]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28 영성체”

      조학균 신부(예수회, 전례학 박사)

       신자들은 영성체를 하기 전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 사제가 성체를 들고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에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하고 외치면 신자들은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하고 고백한다.
       이때 “하느님의 어린양”은 요한 세례자가 예수님께 붙인 칭호이며 동시에 묵시록(19,9)에 나오는 성경 말씀에 근거를 둔 고백이다. 그리고 신자들의 응답은 백부장의 고백(마태 8,8)에 근거해 겸손한 자세와 확고한 믿음에서 나오는 고백이다.
       미사에서 신자들의 고백 목소리는 중요하지만 성체를 모시기 전에 하는 고백은 신자들이 평화스러움과 함께 벅찬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굳은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성체하는 모든 신자들은 성체를 영하기 전에 바로 옆 형제ㆍ자매와 평화를 나눈 것을 기억하면서 기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갖고 영성체 행렬에 참가하는 신자들은 선택된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면서 더불어 경건하게 제단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영성체는 사제가 먼저 성체와 성혈을 영하고(이때 주례사제가 큰 성체의 일부분을 성합에 넣어 미사에 참여한 신자에게 주는 것은 사목적으로 좋은 배려라고 할 수 있으며, 성혈은 일반적으로 사제만 마신다), 특별하게 허용된 경우(미사 거행에서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부제와 다른 사람들, 수도원 미사 또는 ‘공동체’ 미사를 드리는 공동체 회원들, 신학생들, 영성 수련, 피정,영성 모임 등 사목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의 경우-미사경본 총 지침 283항)에는 양형 영성체도 매우 바람직하다.
       성체를 줄 때 사제는 성체를 영할 신자에게 들어 보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신자들은 “아멘”이라는 동의를 표한다. 이때 아멘은 자신에게 보여지는 밀떡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고백하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모든 이들이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셔야 진정한 영성체에 참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성체만으로도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교회간의 일치, 혹은 하나의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생각으로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혹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성체를 나눠 주는 경우가 있는데, 결코 나눠 주어서는 안 된다.
       
       성체를 영하는 신자들은 손으로 영하거나(왼손으로 받고 오른손으로 집어 영한다) 입으로 직접 성체를 영하는데, 한국 교회에서는 손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때 신자들은 사제가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쉽게 받기 위해 사제가 성체를 주는 높이에 맞춰 손을 내민다. 너무 높게 혹은 낮게 손을 내밀 때 그리고 손을 너무 가슴 쪽으로가 있으면 사제들이 성체를 분배하는 데 힘들기 때문이다.
       또 성체 분배를 도와주는 평신도들은 교회에서 주관하는 과정을 이수함으로써 주례 사제를 도와 성체를 분배할 수 있다. 단 성체분배 때 성체가 부족하다고 여겨 성체를 쪼개는 행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성체를 쪼개는 것은 사제(때론 부제)에게 부여된 고유한 권한이기 때문이다.

      2010. 03. 28발행 [1061호]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29 성작”

      조학균 신부(예수회, 전례학 박사)

      영성체가 끝나면 사제는 성합에 남아 있는 성체를 감실에 보관한다. 그리고 성혈이 담겼던 성작을 복사 도움을 받아 씻는다. 먼저 복사가 준비해 둔 물을 가지고 오면 성작 안을 확인한 다음 물로 성작 안을 닦는다. 사제가 성작을 물로 씻는 예식 때 또 포도주를 부어 다시 마시는 줄 아는 신자들도 일부 있지만, 성작 안에 남아 있을 성혈을 물로 깨끗이 씻어 내는 예식이다. 그 이유는 한 방울의 성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찬례를 거행하는데 있어서 눈에 뜨이는 것이 성작인데, 성작에 대한 신학적 지식은 다음과 같다.

       미사 전례가 거행되는 제대가 두 부분(제대 윗부분과 윗부분을 지탱하는 버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성작은 컵(cup), 마디(bond), 다리(foot)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각각의 부분은 서로 다른 의미와 용도를 갖고 있다. 성작에서 컵(cup)의 중요한 사용 용도는 포도주를 담는 것이고, 마디는 컵과 다리를 연결하는 부분이고, 다리는 성작의 중심을 잡고, 서 있게 하는 것이다.
       과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 라틴 전례에서, 성작의 마디는 성체 축성을 한 후에 손가락을 펼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성작을 잡는데 용이하게 사용하기 위해 원형 모양으로 제작됐다. 그래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하느님과 신자들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사제는, 하늘나라의 성(聖)스런 부분과 세상의 속(俗)을 연결해 주는 성작의 마디를 잡고 성찬례를 거행했다. 즉 성작에서 컵은 성스러운 곳, 즉 하느님 왕국으로 설명됐고, 다리는 인간 세상을 표현하는 의미를 지니며, 마디는 인간 세상과 하느님 세상을 잇는 연결 고리로 이해됐다.
       하 느님 구원 은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들에게 다가온 것과 같이 성찬례가 거행되는 이 순간에도 사제는 하느님 은총과 세상의 구원을 연결하는 마디를 잡고서 하느님 왕국과 인간 세상을 연결시키면서 다시 한 번 하느님 은총이 세상에 도래하기를 기원하며 기도를 한다. 그러기에 사제는 성찬례를 거행할 때는 성작의 마디를 잡고 전심을 다해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일부 사제가 가볍게 생각해 성작의 컵 부분을 잡고 거양을 하는 것은 신학적 의미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또 오늘날에는 편리성과 실제적 그리고 예술적이라는 이름 아래 단순하고, 유행 감각을 갖춘 모양의 성작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현대의 성작에 대해서는 새로운 개념을 갖게 된다. 그렇다고 성작이 갖는 신학적 의미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성작에서 컵은 단순하게 어떠한 유동적 물질을 담아 두는 것이 아니다. 컵에는 하느님의 충만한 은총이 담긴다. 이 은총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전달돼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또 이 은총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은 하느님 자녀로서 양육돼 영원한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하도록 초대되는 것이다.
        하지만 무리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성물(성작 혹은 십자가, 14처 등등)은 시간이 지나면 해석을 할 수 없는, 이해 곤란한 추상적인 교회 소장품으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2010. 04. 04발행 [1062호]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30 마침 예식”

      조학균 신부 (예수회, 전례학 박사)

      사제가 성작과 성반을 깨끗이 닦는 동안에, 영성체를 마친 회중은 잠시 침묵 중에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시간을 갖는다. 이 일치의 시간은 감사의 시간이며, 새롭게 태어나는 시간이다.
       사제 역시 성작과 성반을 닦은 후 조용히 침묵 속에 기도한다. 기도의 주된 내용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며, 그리스도와 같이 살며, 그리스도가 가르쳐준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또 회중은 그리스도의 삶을 닮기 위해,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기 위해 창조된 자신의 신원에 대해 확고한 의식을 갖고,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사명에 참여하며 영원한 그리스도 왕국의 도래를 위해 또 복음전파에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시간을 갖는다.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통해 영육에 힘을 얻은 회중은 미사 마지막 부분인 마침 예식에 참여한 후 다시 일상 생활로 돌아가게 된다. 마침 예식은 ‘강복’ 그리고 ‘파견식’으로 이뤄져 있다. 본당 소식이나 간단한 공지사항은 마침 예식 전에 하며, 내용이 길거나 미사의 은총을 감소시키는 내용을 공지하는 것은 좋지 않다.
        마침 예식에는 강복이 있다. 강복의 삼위일체적 구조는 회중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에게서 오는 거룩한 은총에 힘입어 새로운 힘을 받아 자신의 의무를 다하도록 해준다. 강복을 받음으로써 신앙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부활사건은 제자들의 삶을 새롭게 바꿨을 뿐 아니라 제자들을 굳센 신앙으로 변하게 해 신앙의 제자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는 용기를 주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첫 선물로 제자들에게 평화와 함께 성령을 주시는데(요한 20,21-22), 마침 예식의 강복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신 사건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강복을 할 때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하는데, 모든 강복의 원천적 행위이다.
       또 강복은 영원한 삶을 간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며, 세상과 온 인류를 위한 하느님 사랑과 애정의 표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강복을 통한 성령의 은총은 제자들을 새롭게 파견하며 복음전파에 대한 강한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화 사명은 이제 성령의 은총을 통해 제자들에게 이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해 제자들을 복음화 사명으로 초대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이 복음화 사명은 사제의 강복을 통해 오늘날에도 재현되고 있다. 마침 예식은 단순히 미사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화 사명의 수행을 위한 파견의 의미로서 새로운 시작으로 해석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사랑을 전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을 선포하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범을 증거해야 한다.

      2010. 04. 11발행 [1063호]
       
      “[조학균 신부의 미사 이야기]31-끝 퇴장”

      조학균 신부(예수회, 전례학 박사)

      마침 예식이 끝나면, 사제와 부제는 입당할 때와 같이 제대에 입을 맞추고(한국 주교회의에서는 깊은 절을 하는 것으로 정함) 제단에서 내려온 후 봉사자들과 함께 제대에 다시 깊은 절을 함으로써 퇴장 행렬에 들어간다. 많은 공동 집전자와 함께 미사 전례를 마칠 때는 제단이 좁거나 함께 절 하기가 어려울 경우, 제단에 있었던 주례 사제를 중심으로 절을 한 후 퇴장한다. 실제로 공동 집전자가 많은 대미사의 경우에는 본당 사정에 따라 전례 주관자가 퇴장 예식을 진행, 안내하는 것이 좋다. 퇴장 행렬은 봉사자부터 순서대로 하며 주례 사제는 마지막에 퇴장한다.
       
       미사가 끝난 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회중이 주님의 기도, 성모송이나 영광송과 같은 공동기도를 바치지 않는다. 특별한 경우에 한해 회중이 함께 기도를 바칠 수 있지만 함께 하는 기도가 없을 경우에는 바로 퇴장 성가를 불러 사제가 퇴장하는 것을 도와준다.
       일부 본당에서는 사회자가 마침기도로 영광송과 같은 기도문을 낭독하고 회중이 함께 ‘아멘’이라는 고백을 하는데, 사제가 앞서 미사가 종결됐다고 선포했고 퇴장했기에 미사 전례가 사회자에 의해 종결된 것 같은 의미로 전달돼서는 안 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제가 퇴장함으로써 미사는 종결되는 것이다.
       또 사제가 퇴장할 때 퇴장 성가를 부르는데 성가가 너무 길거나 너무 짧아서는 안 된다. 사제가 퇴장하는 시간에 맞게 성가를 선택하는데, 사제가 제의방에서 제의를 벗을 때까지 성가를 부르거나, 성가 후에도 시간적 여유가 있을 경우에는 오르간을 연주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퇴장 성가는 미사 전례를 통해 하느님에게서 받은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복음의 주제와 관련되거나, 전례력에 맞는 노래를 선택해서 부른다. 가능하다면 마침예식 후 퇴장이라는 것을 생각해 조금 빠른 곡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미사가 끝나고 퇴장하는 가운데 회중이 사제를 따라 곧바로 나오는 모습은 좋지 않다. 미사가 끝난 후 남아서 조용히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분들을 위해 여유 있게 차분히 하느님의 집을 나오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성당은 개신교와 달리(가톨릭은 성당을 하느님의 집으로 생각해 설계하고, 개신교는 교회를 기도를 목적으로 하여 설계한다) 하느님이 계신 곳이므로 퇴장을 할 때에도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의 집에서 나오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미 사 전례가 끝난 후 다른 전례라든가 예식이 이어지면 마침 예식, 즉 인사와 강복 그리고 파견은 생략한다. 예를 들면 성 목요일의 주님 만찬 미사 후 성체를 수난 감실로 이동하는 예식이나, 장례미사(고별식)와 같은 것이 해당된다. 다른 전례나 다른 예식을 진행함에 앞서 사회자는 회중들에게 충분한 안내와 설명을 통해 계속해서 이어질 다음 전례나 예식을 준비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당을 나설 때에 성수를 찍어 성호경을 바칠 수 있지만 한국 교회에서는 깊은 절로 대신할 수 있다.

    Viewing 1 post (of 1 total)
    • You must be logged in to reply to this top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