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 17,24-29 마르 10,17-27
우리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왜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집착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물어보게 된 것일까? 그가 바란 것은 진정 영원한 생명일까? 그 청년은 예수님께 질문한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는 자신의 어떠한 노력으로 얻어 낼 수 있는 하느님 나라를 원한 것인가? 마치 우리 사회가 지향하고 가르치는 방향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대상의 것이 아님을 오늘 다시 듣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도할 때 이런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주님 제가 당신께 더욱 마음을 열고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그러나 ‘주님께 제 마음을 열어드리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욱 어울린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변화되어 더욱 충만하게 하느님의 의지에 합치되어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부자 청년의 기도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찾으시는 무엇인가를 통하여 거래하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고 알려주신다.
어릴 때부터 모든 계명을 잘 지켜왔던 부자 청년은 자신의 어떤 노력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재물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는 것에서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것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라는 말씀을 듣고 슬픔에 빠지게 된 청년은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내가 애써 노력하여 번 모든 것들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왜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어려운 방법을 요구하시는 것일까? 만약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면 나에게 하늘나라를 주실 것인가? 만약 그렇게 하고도 예수님의 제자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없게 될 것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아무 어려움이 없게 될 것이다. 명성을 쫓아서 스승을 쫓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서 따르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에 대한 우리 자신의 대답은 어떠한가? 부자 청년처럼 하느님께 의지하기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지만 결국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지 못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느님께 의지함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시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그분께서 나에게 어떤 분이시라고 여러 가지 말을 하는 것보다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섬길 수 있는지를 증거하는 시간이 되어야겠다. 내가 지금까지 이루어 놓았던 업적 때문에 더욱 걸려 넘어지지 않는 하루가 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그분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기에 우리는 그분의 종으로 살아가는 충실한 하루가 되어보자. 아울러 나 자신까지도 주님을 위해 포기할 수 있는 하루가 되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