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연중 제6주일(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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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집회 15,15-20 1코린 2,6-10 마태 5,17-37

       

      우리의 여정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자비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집회 15,15) 짧지만 무거운 말씀이다. 그 누구에게도 불경하게 되라고 명하시지도 않았고 죄를 지으라고 하락하시지도 않으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신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해 보이는 길이 멀고도 험한 길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서일까? 아니면 세상을 아예 모르기 때문일까? 신부(神父)가 되기 전에 ‘사제의 삶’에 대해서, 혹은 자신이 바라는 ‘사제 상’에 대해서 준비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내용대로 살아왔다면 나는 지금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되어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위로를 한다고 변호하는 말이지만.

      한편 세상에 죄는 왜 생겨난 것일까? 그것은 아담의 죄로 인한 죄의 유전설 때문일까? 그렇다면 세례 이후에 생겨나는 죄는 무엇일까? 교리 상에서 배운 본죄라면 그것은 내 안에 죄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특히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말씀들을 돌이켜보면 내가 정말 죄를 피하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시면서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를 변함없이 베푸시는 것은 왜일까?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그래서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렵게 되면, 누군가 조언을 해주거나 지혜를 줄만한 사람을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그런데 막상 인생이라는 여정에서는 여러 지혜와 안내들이 있지만 그 자체가 모든 해답을 전해주지 못하기에 우리 스스로 답을 향해 찾아나서야 한다. 그러나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다. 우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말하면 된다. 이런 단순화의 법칙을 외면하고 스스로 무엇인가를 꾸며나가면서 죄라는 것도 증가되는 것이 아닐까?

      어려운 문제가 다가오면 그 때에는 당황하기보다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질문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해답을 주시기 위해서 탈출구를 마련하시는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의 뜻 안에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해 마련된 길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발견하고 살아가기에 현실의 무게가 클 수도 있고, 앞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포기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의 손길을 제공해주신다. 그것을 우리가 지혜롭게 깨닫기만 하면. 지금껏 내가 살아오면서 만났던 멘토와 협력자와 친구와 부모님과 그 밖의 모든 상황들을 생각해보면 긍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 앞에 걸어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학습하였듯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따라올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지금 어렵다고 포기할 상황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눌 것이 없어서 가난한 것이 아니며, 산이 높아서 오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계명을 깊이 새기며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선물과 축복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도움을 믿고 쉬운 선택이 아닌 어려운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시험에 들거나 어려움에 빠질 때에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여러 가지로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며 오늘 주님의 날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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