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연중 제32주일(1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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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2마카 7,1-2.9-14 2테살 2,16-3,5 루카 20,27-38

       

      언제나 주님의 얼굴을 뵐 수 있는 신앙

       

      주님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간절한 고뇌와 아픔을 나누기 위해,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죄에 대한 용서를 위해, 치유를 받기 위해, 위대하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다가오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거나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성당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릴 것이다. 그러나 그와 반대라면 신앙 또한 식어가거나 나의 삶에서 밀어냈던 적은 없었는가? 또한 우리가 주님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가치와 이익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께 의지할 수 있는 신앙의 모델로써 일곱 형제의 순교사화를 접하게 된다. 참으로 어려운 순간이다. 그러나 살아서 주님의 영광을 보지 못할 양이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는 신앙의 깊이를 배우고 싶다.

      우리 신앙의 핵심에는 부활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 고백에서도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과 생명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만일 하느님의 나라에서 하느님과 누릴 생명의 약속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가 오늘 행하는 모든 것들은 헛된 일이 된다. 그래서일까? 오늘의 말씀은 모두가 부활에 대하여 각자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것보다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우리도 지켜낼 수 있는가? 그 결과로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테살로니카 사람들처럼 처음 받아들인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을 간직할 수 있을까?

      시험의 순간에 넘어지지 않을 정도의 신앙을 지니고 주님께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유혹에서 주어지는 것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가?

       

      예수님을 옭아맬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두가이들의 종착역은 지상에서의 삶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죽음 이후의 삶, 곧 부활한 이들의 모습과 그들의 삶에 대해서 가르쳐주신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기쁜 소식이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라는 것을 알려주신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듣고 알고 있는 대로 고백하며 살아갈 수만 있으면 신앙의 깊이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선물을 살아갈 수 있기만 하면 된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참된 권위를 살아갈 필요가 있다. 그 권위는 무너진 교권을, 신뢰심이 있는 정치권을,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집단 이기주의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예수님께서 살아있는 하느님을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의 기도와 삶이 하나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언행의 일치가 살아있는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서도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는 것을 고백하는 오늘이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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