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 5,18-25 루카 11,42-46
우리 안에 담을 것들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비관론자도 될 수 있고, 염세주의자가 될 수도 있고, 낙관론자가 될 수도 있다. 오늘 독서를 바라보면서 나는 구체적으로 육적인 삶에 지배를 받고 있는지, 영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지 점수를 배정해보자. 절대적인 몰표를 받지 않는 이상 대부분은 공존하거나 싸움을 벌이고 있는 수준에 있지 않을까? 어떤 것들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잘 이행되지만 어떤 것들은 노력해도 힘들거나 지치게 만들어 버리는 것들은 아닐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우리 안에 담아야 할 것들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성령의 모습을 따라가는 것임을 재확인해본다.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의 모습 속에서 주님의 엄격한 질타를 받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행한 악행을 꾸짖는 것은 물론 앞으로 그 모습에 합당하도록 살아가라는 일침이다. 흔히 ‘내가 할 일을 다 했다’고 하면서, 집에 돌아와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가족 구성원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경제적, 문화적, 환경적 조건들을 완벽하게 갖추고 지낼 수 있는데, 단 한 가지 자유로운 결정과 의사표현이 제한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자유라는 표어는 인간의 기본권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유의 범위도 중요할뿐더러 자유를 진정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것도 중요한 숙제가 된다. 사도 바오로가 말했듯이 자유의 의미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나, 모든 순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우리를 또 다시 노예로 만들어 버리게 된다고 경고를 주고 있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에 대한 규칙이 요구되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과 인간 사랑의 계명에 근거하는 모습이어야 한다. 그래서 최소한의 규칙으로서의 법이 요구되는 것인데, 이것이 사람을 위해서 종사해야 하는 것이지, 사람을 법의 규제 아래서 지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먼저 우리에게는 올바른 성령의 법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거나 단식하거나 경제적인 의무를 다한다고 해서 영적인 여정을 완성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정의를 실천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여정의 한 부분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안에 주님의 정의와 사랑의 계명이 살아 숨 쉬도록, 곧 세상 끝까지 성령 안에서 주님을 따르며 생명의 빛을 얻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내 안에 담아야 하는 것은 단순하게 좋은 미덕이 아니라 때로는 악과 싸워낼 수 있는 성령의 힘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