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 3,7-14 루카 11,15-26
교회로 모여든다는 것은
가까운 성질의 것들은 서로 뭉쳐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친화력을 이야기할 때는 상생과 상존의 법칙이 설명되는 경우들을 보게 된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믿음으로 사는 이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율법은 법대로 살아가는 자체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구원을 받거나 의롭게 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에 근거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편 가르기를 하거나 그 밖의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사람들을 만들려고 하는 모습이 있다면, 그 반대로 교회의 사람, 공동체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로 모여드는 이유다. 곧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나라는 개체도 중요하지만 내가 아니더라도 하느님의 구원의 뜻이 실현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에는 흉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흐름 속에서, 특별히 윤리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교회의 가르침과 반대되거나 마찰을 일으키는 부분을 접할 때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싶은 부분은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누구든지 나에게 모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흩어놓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무거운 짐처럼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믿음 생활의 깊이를 주님의 가르침을 생활화하면서 더욱 그리스도의 신비체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만남 가운데에서 자녀를 셋 이상 낳은 부모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예전에 외국 성당에서 한 부부가 대여섯명의 자녀들과 함께 성당에 오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서로가 한 마음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모습을 통하여 주님 안에서 하나로 살아가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복합적인 신호로 방황하게 만들거나 분열된 가정을 만드는 곳이 아니다. 그리고 교회는 모든 것을 심판해주는 재판소도 아니다. 교회는 진리와 정의의 성령을 통하여 교회의 권위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교회의 판단을 존중하고 순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각자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우리 모습 안에는 언제나 악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갈라지지 않았다고 해서 자유로워졌다는 것이 아니다. 더욱 나쁜 영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처럼, 우리의 처지가 더욱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공동체 안에서 교회의 가르침을 더욱 잘 깨닫고, 기도와 공동체 속에서 보호를 받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교회는 단순한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모여오게 된 공동체를 말한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위로와 힘을 얻으며, 주님의 평화를 살아가는 공동체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