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연중 제26주간 화요일(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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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욥 3,1-3.11-17.20-23 루카 9,51-56

       

      기도는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돌리는 행위

       

      어려운 숙제가 눈앞에 다가왔다.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욥 3, 20).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에 대한 대비를 해 놓고 계신 것일까? 내가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그것도 모자라 내 주변의 모든 상황을 가장 어렵게 만들어 놓으신 이유가 무엇일까?’ 라고 의문이 생길 때가 있을지 모른다. 대답은 나도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느님 앞에 거지처럼 구걸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시련일지는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잔인한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가 결국 매달려야 하는 곳은 아버지 하느님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을 때, 곧 당신의 구원 사업의 완성을 위해 여정을 시작하실 때,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의 받아들이지 않음을 비난하지 않으시고, 다른 마을을 통해 여정을 계속하신다. 예수님의 길은 참으로 고되고 비참한 길이었다는 것을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처절한 삶의 외침으로 느껴본다.

      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는 가톨릭 교리에서 말하는 기도의 정의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에게 기도는 영혼의 달콤함이다. 그것은 하늘을 향해 눈을 돌리는 것이며, 인정과 사랑의 울부짖음이며, 시험과 기쁨 모두를 포옹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누군가의 마음과 영혼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것’이라고 교리는 말하고 있으며, 동시에 기도는 말이나 동작 속에 표현되는 모든 것이 기도하는 사람 전체의 것이라고 전해주고 있다(2562). 히뽀의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인간은 하느님 앞에 선 거지다.”라고 말했다.

      하느님의 대답을 듣기까지 모든 것을 신앙 안에서 증거하는 욥의 모습을 통하여 우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함을 깨닫는다. 의인에게 다가오는 고통이 주제가 된 욥의 내용처럼,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다가와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될 때, 주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지녀야 함을 배우게 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기도를 하는 순간에는 우리가 더 이상 다른 무엇인가로 꾸밀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직 하느님과 대면하여 그분께 나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듣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쁜 일을 결심하였다가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것이 꾸지람이 되더라도, 옳은 일을 행하게 되는 모습을 복음서의 제자들을 통해서도 묵상하게 된다.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되새겨 본다. 그리고 그 기도의 모습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께 맞춰져야 한다는 것을 다짐해본다.

      “우리의 도움은 주님의 이름에 있으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이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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