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연중 제23주일(9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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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에제 33,7-9 로마 13,8-10 마태 18,15-20

       

      진리의 말을 따르면

       

      세상 안에서 일치와 평화와 화해를 성장시키기 위해 우리를 불러주시는 예수님이라는 표현을 우리가 사용하고 있다면, 그 모습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모든 나라는 자국의 국민을 보호하고 복지를 보장하기 위하여 법을 실행하고 있다. 때로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는 순간도 있지만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서 전해지는 광고 메시지처럼, 우리는 이런 규정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넘어지거나 떨어져서 다쳤을 때 수술을 받듯이, 지금의 변호사를 부르십시오. 당신의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당신 옆에 서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광고용 멘트는 우리가 생활하는 사회 속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지게 왜곡된 내용일 수 있다. 그래서 실제로 법을 시행하면서도 정의가 아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만 드러날 수 있다. 따라서 그 결과는 천박한 소송으로 드러나고, 높은 보험료와 서로에게 정중한 태도로 행동하지 못하게 만들게 된다.

      여기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정신적인 해독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처방전이라는 것이다. 곧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일치와 화해를 증진시키겠다는 서약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런 일들을 도와주는데 그치지 않고, 이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세상에 증거 하는 모델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물론 그분과 논쟁하려고 앉아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상식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이야기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 된다. 그리고 그 속에 우리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계명이 자리하지 못하면, 곧 서로에 대한 간절한 연민과 사랑이 없다면, 책임감 없이 사라지는 무엇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논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논쟁의 목적과 방향이 어디인지 깨닫지 못한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것은 복수나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조작하는 치열한 각축장으로 변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논쟁의 쟁점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사랑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언자를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우시어, 악인들에게 다가온 위험을 경고하여 죽음의 길을 걷지 않도록 이끄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것을 임의로 변경할 수는 없다. 단순히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 따르기만 한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지치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에 다가서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사랑의 실천이며, 화해와 용서의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 서로 선을 향한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간절히 청하기만 한다면 그것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어려움 속에 놓여 있을 때마다 더욱 같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지름길이며, 우리가 스스로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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