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코린 6,1-11 루카 6,12-19
자비와 사랑인 하느님의 정의
“생명이 다하는 그곳에 바로 신이 있다.”고 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곁에서 언제나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돌보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자비와 사랑의 선물을 베풀어 주시는 분임을 체험하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실 때에도 밤을 새우며 산에서 기도하셨음을 보여주신다. 이것은 누구든지 책임자의 자리에서 사람을 뽑거나 뽑은 사람들과 생활하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어려운 부분이 이렇듯 사람을 뽑아 공동체를 꾸미며 주님의 복음 선포를 같이 해나가는 일이 아닐까? 정치인들 가운데 후보자에서 탈락된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람을 선택하는 것과 그 자리에 알맞은 사람을 고른다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는 이유는 왜일까? 그리고 누가 그들을 비판하고 어디까지가 공명정대한 것인지 궁금해지는 것은 왜일까? 자신의 자리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왜 어렵게 느껴질까? 분위기를 그렇게 만들어가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 마구 흔들리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도리어 스스로 불의를 저지르고, 또 속입니다. 그것도 형제들을 말입니다.” 나의 마음을 대변한다고 할까? 아니면 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고 할까? 시원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겨졌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라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살아가며, 판단하고, 심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지혜 앞에서, 자비와 사랑의 기준에 따라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임을 깨닫게 된다.
손해 보고 싶지 않은 생각에 입각해서 우리는 서로를 고발하고 깎아 내리는 것은 아닌가?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사실과 증거와 정당한 기준들을 살필 뿐만 아니라 신앙에 충실한 삶은 정의 자체로서 누군가 다른 사람들과 불목하지 않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임을 되새겨 본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청할 때마다 이기적이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하느님의 자비는 그분의 정의를 체험할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심판은 우리가 충분히 알아듣기 어려울 수 있다. 마치 ‘내리 사랑’의 위치에서 다른 사랑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이분법적인 구분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정의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서 죄의식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벌을 받아도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세상에 오셔서 첫 번째 성찬례 기도문에서처럼, 우리가 행한 대로 갚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느님의 용서를 우리에게 주셨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할지 준비해보자.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자비였다.
나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위험한 고비를 많이 넘겼는지 헤아려본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