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 1,24-2,3 루카 6,6-11
감추어졌던 신비
우리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답이다.
오그라든 손을 갖고 있는 사람의 모습보다 더욱 오그라든 사람들의 마음을 펴주시려는 분을 만나는 것이다. 손이 불편해졌던 경험이 있다. 둘 팔을 다쳤을 때다. 그렇게 되고 나니 하고 싶은 일은 많으나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리로 걸어간들 손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없는 처지여서 어쩔 수 없는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있었다. 그래도 마음은 편안했다. 왜냐하면 꼭 필요한 것의 도움을 받았고, 이렇게 사랑의 손길이 있기에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인생이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주님 만이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라는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래서 대단한 가난과 도움을 체험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화를 내는 것’ 곧 분노에 대해서 무조건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정의롭지 못하거나 불공평한 대우에 대해서는 화를 낼 수 있다고 말했으며 심지어 선이 될 수 있는 악과의 싸움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분노가 우리를 지배하게 만들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게 될 것이며 그것이 처음에는 좋았다고 하더라도 끝은 아픔으로 마무리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들을 고쳐주신다고 해서 매우 분노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유다인들의 전통적인 안식일 규정을 깨는 것으로 비춰졌기에 정의롭지 못하다고 보여졌던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잘 정돈된 예식과 규정을 흐트러트리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때로는 정상적인 규정을 넘어서는 그래서 죽음으로 치닫게 만드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고 알려주신다. 결국 우리는 매 순간 새롭게 나오는 것들에 대해서 그것이 학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과학적인 것이든, 알아듣거나 이해하기 힘들다는 비유로 다가오신 것이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정돈된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그들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놀라운 치유의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잘 모르겠는 순간이나 혼돈이 다가오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너무 가까이 혹은 한쪽 방향으로만 정해져서 못 볼 수 있는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하기를 소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