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연중 제16주간 목요일(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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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탈출 19,1-2.9-11.16-20 마태 13,10-17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전해진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법은 다양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불과 천둥과 번개 속에서 말씀하시는 분으로 다가온다. 갑작스럽게 들리는 소리와 섬광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놓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종종 그분의 메시지를 무시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열린 강좌를 실시하신다. 모든 이야기들은 대단한 상징과 말씀으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사용하셨을까? 직접적인 화법을 사용하거나 간단하게 설명해 주실 수는 없었을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의 어떤 말들과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말씀을 읽거나 듣는 순간에 우리에게 전해지는 무엇인가를 알고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를 전달하는 것보다 더 많이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다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질문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흑백 논리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잘 적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한 가르침을 주셨다. 십계명은 그 좋은 예가 된다. 거짓말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이것은 매우 분명하고 직설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그것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고 진복팔단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가르침들을 이미 받았음을 기억하게 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보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의로움을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마태 5,8-10 참조). 우리는 이미 밝혀진 참된 행복의 선험적 정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예수님과 더욱 깊은 친밀한 관계 속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그분 안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것이 천둥과 번쩍이는 불빛이거나 침묵 속에서든 그분의 권능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비유를 통해서든 정형된 전례적 언어 속에서든 우리에게 당신의 메시지를 전해주신다. 그 방법이 어떻든 우리에게 전달되는 메시지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나누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귀가 있어서 듣고, 눈이 있어서 보기를 원하시는 메시지이며, 우리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동참할 수 있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메시지다.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순간에 주님의 뜻을 되새기를 하루가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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