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까 1,1-8 루카 9,7-9
주님의 기쁨인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보고 기뻐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는가? 주님께서 우리 곁에 오셔서 함께 머물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우리가 저버린다고 해도 다시 생명력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의 능력을 바라보는가?
보통은 부족한 사람이 풍족한 사람을 찾아 나서게 마련이다. 스승이 제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스승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친히 우리를 찾아오시어 모든 것을 내어주시면서 구원을 베풀고자 하신다. 이것은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래서일까? 헤로데는 일찍이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었기에 모든 것이 끝난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또 다신 소문에 들리는 예수님을 다시 만나보려고 했다는 것을 통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들고 있다.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또 다시 비춰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또한 독서에서는 주님의 집을 지으라는 명을 받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안식에만 신경 쓰면서 이웃과 하느님께 대한 근본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주시는 방법이 되고도 남는다.
‘어찌하여 그 사람은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매일 그럴 수 있는가?’ 등등의 의문이 생기는 일이나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대답은 ‘주님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헤로데는 결코 기쁜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직책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롭지 않은 관리인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세례자 요한처럼 거침없이 주님의 말씀을 전하던 새로운 인물이었음을 생각해본다. 결국 하느님께는 헤로데도 기쁨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음을 묵상해본다. 그에게도 복음은 필요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내가 주님의 기쁨으로서, 복음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