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을 펼치면서
연말이면 행사처럼 아궁이 앞에 앉아
편지도 태우고 사진도 불태워 없애고
불필요한 기록들도 불속에 던져버린다.
기록이란,
특히 우리처럼 단순 명료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그 자체에 의미를 두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인 연장은 불필요하다.
태워버리고 나면 마치 삭발하고 목욕하고 난 뒤처럼
개운하고 홀가분해서 새 삶을 시작하고 싶은 의욕이 솟는다.
<금강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과거의 마음도 찾아볼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찾아볼 수 없으며,
또한 현재의 마음도 찾아볼 수 없다.”
찾을 수도, 얻을 수도 없는 이 마음을 가지고
어디에 매어두어야 한단 말인가.
찾을 수 없는 마음이라면 텅텅 비워버려야 한다.
텅 빈 데서 비로소 메아리가 울린다.
어디에도 집착이 없는 빈 마음이
훨훨 날 수 있는 자유의 혼을 잉태한다.
거울에 사물이 비추는 것은
거울 자체가 비어 있기 때문이다.
거울 속에 만약 무엇이 들어가 있다면
거울은 아무것도 비출 수 없다.
그것은 거울일 수가 없는 것이다.
『맑고 향기롭게』/ 법정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