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시오 디비나의 시간과 장소
성경 독서를 잘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먼저 고정된 시간이 중요하다. 성경은 시간이 남을 때 아무 때나 재빨리 읽어도 좋은 책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집중해서 읽는 것이 불가능하며, 또한 하느님 말씀 안의 깊은 영적인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읽고 듣기 위해서는 여유롭고 넉넉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특별히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독서를 위해 따로 떼어진 자유롭고 여유로운 시간(seposita tempora)의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그러한 시간을 “하느님께 봉헌된 시간”으로 간주하고 하느님 말씀에 온전히 전념해야 한다. 그런 여유로운 시간 안에서 비로소 성경 말씀을 집중해서 읽고 경청하고 묵상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복잡한 일이나 사람들과의 빈번한 관계에서 떠나 자유롭고 편한 시간이어야 쉽게 집중해서 성경을 읽고 들을 수가 있다.
그다음으로는 성경을 어디에서 읽어야 하는가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어느 특정한 장소만 주장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저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고요함이 유지되고 남에게 방해받지 않는 장소여야 한다는 것이다. 분주히 움직이는 일터나 혹은 여러 사람이 수시로 드나드는 개방된 공간은 성경 독서나 성경 묵상을 하기에는 그리 좋은 장소가 아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고요한 장소에서 옛 성현의 글을 접하면서 온 마음으로 읽고 또 읽으면서 남모르는 기쁨을 만끽하였다. 대개 수도승들은 수도원의 고요한 분위기 안에서 자기 개인의 독방, 공동 방, 도서실, 혹은 정원 등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했다. 그들은 렉시오 디비나 시간에 누구로부터 방해받음이 없이, 각자 고요한 곳에서 그러한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성경 독서나 성경 묵상을 위해 고요한 분위기가 유지될 수 있는 그러한 공간이 있다면 매우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한 장소는 쉽게 성경 말씀에 집중하게 하고,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게 만든다. 그러한 장소는 영적 투쟁의 장소이며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곳이다. 그곳은 또한 야곱이 꿈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본 후에 잠에서 깨어나,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세 28,17)”라고 고백했던 “베델”이라는 곳이다. 즉 우리가 말씀을 대면하고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그곳은 영적인 의미에서 또 다른 “베델”이 된다.
주님은 기도하기를 원하는 자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 6,6)
여기에서 골방은 장소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분주하고 시끄럽지 않은 그러한 고요한 공간을 의미한다. 성경 독서나 성경 묵상을 잘하기 위해서 그러한 고요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허성준 가브리엘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출처 : 인천교구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