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선교의 수호자) 기념일(12월 3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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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신명 10,8-9 1코린 9,16-19.22-23 마르 16,15-20

       

      영적 눈을 뜨게 도와주시는 주님의 양식

       

      희망과 기쁨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림을 그려본 적이 있는가? 그것이 나 자신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다. 내가 주님의 은총으로 치유를 받고 그분의 가르침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면 그 자체로 증거적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은 새로운 희망의 단초일 뿐이다. 오히려 더 큰 희망을 볼 줄 아는 사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던 제자들, 사람들의 모습 속에는 아마도 이런 모습이 각인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진 박해를 당하면서도,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선포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큰 도심의 사거리에 서 있다고 가정해 보자.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곳에서 사람들은 신호들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호의 바뀜과 동시에 흐르는 물처럼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인파에 묻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 길 건너편에서 내가 잘 기억은 못하지만 혹은 잘 모르는 사람이‘안녕, 잘 지내?’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습관적으로 ‘그래 잘 지내, 너는 어떠니?’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이것이 미국에서 느끼는 일반적인 인사말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런데 그쪽 사람이 길을 마주 건너오면서 ‘나는 매우 좋아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잘 지내.’라고 말하면서 지난다면 어떻겠는가?

      길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이상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항상 길 위해서 사람들을 치유하셨기 때문에 그려본 것이다. 어떤 병자들도 그들의 치유를 받을 때 그들 자신 안에 있는 확신으로, 믿음으로 치유를 받게 된다. 그들의 치유와 회개는 기적이 아닐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인도해주시기를 바랐던 것뿐이다. 만일 장님들이 모든 물체를 뚜렷하게 볼 수는 없었더라도 그분께 대한 증언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수많은 인파 속에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사람들을 제대로 혹은 잘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활은 영적 어두움에 휩싸여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되돌아 본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많은 사람들은 간절하다 못해 처절하게 따라다녔다는 것을 어려움 없이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의 행적에 함께 해주시며 표징들로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주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주님께서 친히 그들, 곧 주님의 복음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속 재산이 되셨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흔적처럼 우리에게도 흔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아픔이 아닌 기쁨과 희망의 흔적이다. 그리고 입으로가 아니라 삶에 깊이 파고들어야 하는 흔적이다. 힘껏 외치며 매달리고 다가가는 이유는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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