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성주간 화요일(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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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이사 49,1-6 요한 13,21-33.36-38

       

      우리의 약함을 보고 아시는 예수님

       

      “믿는 도끼에 발 등 찍힌다.” 내가 의지하던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인간이 꾸미는 계략이 얼마나 추악한지를 보여주는 격언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억울함을 이야기하는데 그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마음과 생각과 행동으로 다가서야 하는지를 생각해 본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니체는 “행위는 약속할 수 있지만 감정은 약속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감정은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동기와 방식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고 싶지만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한 행위를 보장해주는 조건이나 방법이 바뀌면 지킬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바빌론 유배의 끝을 바라보며 예언하는 이사야 예언서의 글을 듣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역사 속에서 심하게 흔들린 민족이었으며, 동시에 구원의 민족이 되어야만 했다.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의무에 충실해야만 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적을 쳐부수도록 허락하셨고, 유배 생활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으로 돌려보내시는 하느님을 경외해야만 했다. 이것이 독서를 통하여 주어지는 새로운 각오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의 재건을 위하여 일어날 어떤 사람을 하느님께서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채워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 때에 다시 화합과 일치를 이루고, 모든 민족들의 빛처럼 빛나게 될 것이다. 유배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많은 충실한 유대인들을 위하여 이 말씀은 그들의 마음에 빛을 주었고 그들의 신앙에 항구하게 남아 있을 이유를 제공하였다.

      어둠 속에서 비춰지는 빛의 모습은 복음에서 증거 된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밤 혹은 어둠에 대해서 듣게 될 때 그것이 분명해진다. 최후의 만찬 식탁이 열리고 있다. 그 속에서 제자들과 함께 앉으셔서 마음이 산란해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된다. 그분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 배반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시고, 배반자로 보여지는 유다에게 빵 한 조각을 적셔서 주신다. 그리고 빵을 받고 밖으로 나간 때는 밤이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왜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도록 내버려 두셨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위한 필요불가결한 희생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의 선택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결정적인 행위를 한 것은 우리의 나약함이지 하느님의 계획이나 강압은 아니다. 이제 예수님과 모든 제자들에게 어둠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 어둠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 더 이상 너희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씀을 깨닫도록 이끌어 준다. 그러자 베드로는 자신의 목숨을 예수님을 위해서 내어 놓겠다고 장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모든 선언들에 앞서 베드로의 모른다고 할 부정의 도전을 말씀해주신다.

      그렇다면 이 사건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느낄 수 있는가? 모든 배반과 부정 뒤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뒤에 인류를 위하여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주시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때문에 이 어두운 시간은 우리가 여러 차례 예수님을 부정하거나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계시다는 확신을 가져다준다. 물론 아직은 어두운 밤이지만. 이제 우리의 약함을 더욱 깊이 고백하며, 그 속에서도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알고 계시는 주님께 나아가는 시간이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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