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34,4-6.8-9 2코린 13,11-13 요한 3,16-18
관계성의 결정체인 삼위일체
‘우리’라는 표현을 생각해보자. 나와 너, 혹은 너와 나. 그 무엇이 되었든 개인의 영역을 벗어난 표현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조건을 완성시켜주는 중요한 골조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언어적 습관 혹은 관습 혹은 문화적인 요소들로 인하여 개인주의적인 모습들이 가득해지는 것은 왜일까? 필요할 때만 도움을 청하는 정략적인 관계가 아닌 진정한 관계 속에서의 삶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일까? 누구나 실수를 통하여 배우게 마련이지만 그것을 속 시원하게 풀지 못하는 것은 상대방의 잘못이 크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 자신의 꽉 막힌 기만일까? ‘관계’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친밀한 신비의 단어라는 것을 되새겨보면서 오늘의 축일을 맞이해본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지금까지도 설명하기 힘든 신비이며 믿을 교리로 선포된 가톨릭 신앙 가운데 하나다. 어떻게 세 위격 안에 한 분 하느님이 계신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삼위의 하느님에 대한 정의는 완전히 이해되지 않고 있다. 그러기에 안타깝게 그 신비를 밝히는데 시간을 낭비하기 보다는 우리 삶을 위하여 삼위의 신비 안에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함축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조사하는 것이 더욱 현명하지 않을까? 더 많은 노력과 정의는 학자들에게 남겨두고, 우리는 삶의 신학을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기능이 많은 무엇인가보다 기능에 충실한 무엇인가가 더욱 현명하다는 판단’이 분명하다면 지금의 의견이 더욱 힘이 있지 않을까?
삼위의 신비는 근본적으로 그분의 본성으로서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세상과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다. 사람들을 창조하셨고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우리를 구원하셨다. 성자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제자들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셨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아가도록 힘을 주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성령이 위아래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서열을 잡는 것이 아니라 관계성에 관한 것임이 분명해진다. 물론 이것도 비유적인 표현이라는 것이 설명의 한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살아가도록 불림 받았는지를 놀랍게도 함축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사랑과 일치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의하여 완벽하게 예시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신다. 이로써 우리는 서로에게 나눌 무엇인가를 살아가도록 불림 받은 것이다. 성자께서는 아버지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에 의지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아버지께 의지하도록 불러주셨고, 만족하며 축복을 받는 존재로 살아가도록 깨우쳐주셨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로의 여정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오셨으며, 생활 속에서 타인들을 돕도록 불러주신다.
결국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의 유대를 우리도 닮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사랑의 일치를 본받아 모든 형제자매들과 일치를 이루기 위하여 불림 받은 것이다.
우리가 비록 이 신비의 깊은 뜻은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본상 안에서의 일치의 관계성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된다. 바로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 안에서 사랑의 일치를 이루면서 살아가도록 깨우쳐주시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창조된 우리와의 사랑의 모습과 아들을 통한 구원의 사랑과 성령을 통한 거룩함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도 서로간의 관계성에 오늘의 신비를 재현하는 시간을 마련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