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 5,910-12 2코린 5,17-21 루카 15,1-3.11-32
자비로 다시 살아난 인생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거나 느끼지 못하는 때가 온다면 어떨까? 하느님 앞에 나아가 기도를 하여도 들어주시지 않고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면 어떨까?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비난하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해주신다. 돌아온 탕자가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모습이 더욱 근본적이라는 것을 말씀해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서로에게 좋은 점을 찾아내는 것은 자연적인 일이다. 그리고 좋은 소식을 듣고 싶어 하며 축복을 받기를 원한다. 누구도 예외 없이 좋은 삶과 건강과 행운을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실생활에서는 이것을 원하면서도 우리 모두가 인간이기에, 크리스챤이기에 타인을 위한 좋은 일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것처럼 타인들에게도 주님의 은총이 나를 통하여서도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통하여서는 많은 묵상을 할 수 있다. 우선 대부분의 경우 나 자신이 탕자의 모습으로 보여 질 것이다. 실재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주신 선물을 낭비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나에게 소중한 순간을 잘 활용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매일 확인하면서 준비하는 것이다. 그런데 낭비와 무절제로 인한 모습 뒤에 아무도 곁에 남아있지 않는 체험을 하면서도 원망을 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는 작은 아들의 모습 속에서 놀라움을 발견한다. 우선 나 자신의 모습은 변명과 합리화로 가득할 때가 없었는가? 그리고 나에게 유리할 때만 다가가지는 않았는가? 혹 조금이라도 이익이 관계 된다면 포식자처럼 달려들지는 않았는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작은 아들은 비난하지 않고 자신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근본적으로 그는 지혜롭고 선한 존재였던 것이다. 순간의 선택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을 낭비한 것을 뉘우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아들은 아버지의 더 큰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르침이 있으니 첫째는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지만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사람들에게조차 선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가 하느님의 자비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관대한 자비의 선포는 우리가 자신의 나쁜 습관에서 하느님께 돌아가기만 한다면 화해와 용서와 자비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자비를 그가 누구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삶에 필요한 자비와 용서를 하느님께 청했듯이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도 자비를 나눌 의지가 생겨나는 것이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용서와 자비를 나눔으로써 그들 자신을 죄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는 것이다.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다시 한 번 우리 모두는 선을 위해서 기도하며 활동하는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와 비교될 어떤 것도 세상에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화해의 사랑의 도구가 되는 한 주간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선포처럼 고해 성사를 통하여 화해의 직분을 수행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