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사순 제3주간 화요일(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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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다니 3,25.34-43 마태 18,21-35

       

      용서를 바라는 대로 용서할 수 있는 신앙인

       

      무자비한 종의 모습 속에 떨어져 있는 나약함을 듣게 된다. 오늘 이 이야기의 시작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자신의 형제가 용서를 청하면 얼마나 용서해주어야 하는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제안했듯이 일곱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답변하시면서, 일흔 일곱 번, 곧 무제한적인 숫자의 용서를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용서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주신다.

      오늘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많은 빚을 진 사람을 용서해주시는 주인으로 나타난다.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을 주인의 규율에 포함시키면서 우리 역시 퍼주는 용서를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돈을 빌리는 것에 대하여 오늘의 복음 말씀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들이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라면 어려울 수 있다. 누군가 예전에 못된 말들의 소문으로 고통과 수치를 남긴 상처가 있다면 그를 용서했거나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공격을 가한 사람이 용서를 청하기 위한 통곡이 없었다면 인간적인 차원에서 이야기 속의 종이 했듯이 그를 몰인정하게 대하겠는가? 그를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직도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면 무엇 때문에 불림을 받았는지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다.

      여전히 오늘의 말씀은 다른 가르침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빛에 대한 즉각적인 용서와 사면을 뒤로 하고 그 종의 무자비한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주의를 주시고 있다. 그분께서 바라신 것은 우리가 바라는 어떤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었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는 것처럼 우리의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무자비한 종처럼 다뤄질 것이다. 이제 그 누구도 그와 같은 대접을 받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전체 빚을 다 갚기 전에는 형리에게 넘겨져 고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야기의 초점은 우리가 하느님의 손에 의하여 벌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처럼 우리도 서로 같은 자비를 베풀고 살아가라는 것이다. 누구도 이것이 쉽다고 장담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에게 오늘의 말씀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고 해서 그들을 향한 친절을 거둘 필요는 없다. 용서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보다는 오히려 분노와 복수를 하고 싶은 쪽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우리에게 오늘의 말씀을 해주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꼭 필요한 행위를 알려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용서는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도구라는 것을 깨닫는 오늘이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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