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사순 제2주간 월요일(3월 21일)

Viewing 1 post (of 1 total)
  • Author
    Posts
  • #1611
    정하상성당

      다니 9,4-10 루카 6,36-38

       

      우리에게 담아주신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나누는 삶

       

      이런 엉뚱한 상황을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사귀기에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 공통점이 있다는 것보다, 서로 비슷해져서 고여 있는 물 같은 상태보다, 알 것 다 알아서 미지근한 관계보다 낫다.’ 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 뜨거운 부위에서 차가운 부위로 열이 옮아가듯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다면 인간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귐과 닮아감에 대해서 조금은 깊은 묵상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짐승이나 간부나 임원 혹은 어떤 대상으로 보게 된다면 어떤 세상이 될까? 내면과 외면이 하나로 일치하는 것은 어렵다고 하겠지만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 안에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 자랄 수 있지 않을까?

      그림에 열정을 보이는 딸아이를 둔 엄마가 지금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 딸이 ‘하느님을 그려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엄마의 눈에는 어디에도 하느님의 모습을 나타내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딸이 ‘내가 끝내고 나면 보실 수 있을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이 어린이처럼 우리는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감추시지 않는 하느님의 모습이 결국에는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때때로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숨으려고 한다는 사실이 문제다.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표징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데 초점이 있다.

      다니엘 예언자를 통하여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다니엘은 “저희는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라고 겸손한 기도를 한다. 그리고 이처럼 자비와 사랑과 용서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복음서로 이어진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거울에 비춰보듯 보여주시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옹하시는 그분의 자비, 이해, 용서는 찬미를 받으셔야 한다고 말씀해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진 하느님의 자녀들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담아주신 그분의 모습을 나누고 있는 것을 알려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모든 것을 종종 잊어버리기에 스스로 파괴하는 결과를 고백하게 된다.

      우리가 이 모습을 잊어버릴 때,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하고 비난하게 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교만해졌을 때 쉽게 다가오며, 우리가 진리의 조각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할 때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불공정하게 판단하여 남을 공격하거나 근거 없는 비난으로 고통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용서받고 싶으면 용서하고, 선물을 받고 싶으면 주라’는 말씀은 우리의 현 생활 속에서 충만하게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체험한 것을 이웃과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눈으로 볼 수 있고 그분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리도 그분처럼 관대하게 될 것을 바란다면 오늘 우리가 그분의 길을 바라보며 주님의 길을 걸어가야겠다.

    Viewing 1 post (of 1 total)
    • You must be logged in to reply to this top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