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사순 제2주간 목요일(3월 24일)

Viewing 1 post (of 1 total)
  • Author
    Posts
  • #1614
    정하상성당

      예레 17,5-10 루카 16,19-31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나눌 수 있도록 가르치신 예수님

       

      죽음이 삶의 다른 얼굴 혹은 살아있는 것에 대한 현실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해본다. 죽음이 있기에 생에 대한 애착이 생기는 것이고, 더욱이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으로 옮아가는 삶에 대해서 묵상하고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겪게 되는 생활 속에서의 고통과 고난은 위기가 아닌 살아가는 활력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은 생의 전환점이며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문제는 우리가 죽음의 장면을 설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고통의 순간, 도움이 필요한 순간을 향해 열려 있는 삶을 준비하는 것은 대단히 유익하고 중요한 결심이다.

      오늘 복음에서 자기 집 문밖에 고통과 배고픔으로 누워있는 라자로를 곁에 두고도 낭비하다 죽은 부자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마도 그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모습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을 수 있다. 또는 그를 의식적으로 무시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 부자는 죽음 뒤에 남겨진 영원한 고통 속에 떨어진 후에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의 다섯 형제들도 그와 같은 방식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그 부자는 그들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한다. 자신이 이런 처지에 놓일 줄을 어찌 알았겠으며, 이미 알았다면 어찌 그렇게 생활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이 스스로 그것을 찾지 않는다면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사람이 있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의 이웃, 지구촌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다. 그런데 예언자가 말했듯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 내용을 듣고 사랑을 보여주려는 대신 비난과 무시와 기피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약자들, 방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미리 보여주셨다. 그분은 그들을 돌보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는 드라마와 같은 방법으로 봉사하라고 불린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가 마더 데레사 같은 방법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손을 뻗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부하는 삶의 모습도 다양한 방법으로 열려 있다. 심지어 교회의 기관을 통해서도 그 역할은 충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눈과 마음을 열기만 한다면 우리는 더욱 많은 참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혹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우리 집 정문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미사에 오고 싶어도 건강이나 교통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신자일수도 있다. 혹은 아프고 병들고 외로운 이웃의 장거리를 봐주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구체적인 실천이 될 수 있다. 혹은 가족 구성원 가운데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들일 수도 있다. 아마도 음식은 충분히 먹었지만 사랑에 굶주리거나 관심에 굶주린 이웃에게 나는 어떻게 대할 수 있겠는가?

       

    Viewing 1 post (of 1 total)
    • You must be logged in to reply to this top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