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사순 제1주일(3월 13일)

Viewing 1 post (of 1 total)
  • Author
    Posts
  • #1603
    정하상성당

      창세 2,7-9; 3,1-7 로마 5,12-19 마태 4,1-11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 창조와 구원

       

      들숨과 날숨, 인간으로 태어날 때에 처음으로 공기를 들이마신다는 것의 의미를 새겨본다. 탯줄로 숨을 쉬다가 허파로 숨을 쉬기 시작하면, 우리가 숨을 쉬는 공기에는 어떤 중독 물질이 담긴 듯, 공기 없이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존재로 변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중력의 힘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된다.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기는 하지만 하늘의 마음을 잊어버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스며든 죄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온 것인지 생각해본다. 영혼을 감싸고 있던 육신이 느껴지고, 그 육신 때문에 부끄럽고 무거움을 느끼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느님만을 생각하고 그분의 모습 속에서 살다가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알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순간 몸서리 치고 있는 내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제부터 끊임없는 유혹이 나를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계속해서 인간 존재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외부에서 다가오는 위협인가? 아니다. 그것은 내 안에서 모든 것을 주도하는 자아(自我)다. 인간의 지능의 발달로 자신을 더 높은 단계로만 나아가려는 순간 잃어버리게 되는 겸손과 양심과 마음과 감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하면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를 바랐던 요엘 예언자의 말을 기억한다. 그렇다고 하느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시며 분노에 더디신 분이시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오늘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모습 속에 사랑이 담겨져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기본적인 상황에 대한 이해 속에서 배은망덕의 모습으로 인간의 추락을 보게 된다. 세상에 죄가 처음 들어온 것은 뱀, 곧 유혹자, 사탄의 말을 듣고 첫 번째 인간의 교만에서 자리한 것이다. 이 교만은 우리의 창조자처럼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결정을 내리게 한다. 아담과 이브로부터 전해진 원죄의 결과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자유와 사랑을 오해하고 왜곡된 길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끝에서는 우리가 아담과 이브와 같은 모습으로 하느님께 대항하고 서로 상처를 주는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죄는 우리의 마지막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오셨기 때문이다.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고 있듯이 ‘정의로움’으로 우리의 죄를 구속하셨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 첫 인간의 죄를 치위기 위해서 오셨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육화신비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분의 신비로운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정의로움을 주신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것, 곧 우리가 죄에 약하고 유혹의 힘이 크다는 것을 알고 계신 분이셨다. 이제 구세주 예수님께서 죄 외에는 모든 것에서 우리와 같은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복음에서는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교활한 유혹의 전쟁에서 첫 번째 인간이 겪었던 유혹과 보상에 대하여 듣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적으로 다른 모습, 곧 사탄의 말들을 물리치시고, 아버지께서 완수하라고 맡기신 사명에 충실하게 의지하게 된다.

      여기에 중요하면서도 교묘한 사탄의 유혹을 떠올려본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도 끊임없이 외쳐댔던 것이었다. 만나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돌보심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올려 본다. 결국 그들은 황금 송아지라는 우상을 만드는 죄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는 이런 위험의 요소는 없는지 살펴보고 그 독소를 정화하도록 주님의 법에 의탁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것은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 근거하는 것이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모든 순간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겨내신 유혹의 모습은 과거로부터 이어졌던 죄의 사슬과 아버지께 대한 신뢰 속에서 이루어진 대조였다. 그것은 예수님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신적 모상을 갖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승리였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리고 그분의 구속 사명은 모든 인류를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 앞에 어려움이 놓인 것이 아니라 풀어나갈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수난 신비에 동참하는 한 주간이 되어보자.

    Viewing 1 post (of 1 total)
    • You must be logged in to reply to this top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