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3,1-10 루카 11,29-32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에 청하는 우리의 용서
내가 남의 신앙을 판단할 기준과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어떤 규정이나 준거에 비교해서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기준에서 상대방의 신앙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갤러리에 가서 그림을 감상한다고 가정할 때,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그리고 싶었던 것인지를 꼼꼼하게 확인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저 얼굴 인사를 하기 위해서, 체면 때문에 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무엇에 대한 갈망과 애정이 없다면 그것에 대한 심미안을 갖는다는 것과 사랑을 느낀다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기에 누군가의 특정한 것에 심취하기 보다는 늘 한결같은 모습 속에서 더욱 깊이를 더해가고 새롭게 깨어나는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그들은 공부를 하거나 조사를 하여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을 느끼고 응답한 것뿐이었다.
나는 머리와 가슴 가운데 어느 쪽에 더욱 비중을 두고 살아가는지 살펴본다. 큰 그림을 보는지 작은 그림에 갇혀 사는지 돌아봐야 한다. 인간적인 모습 속에서 참 인간의 회복을 준비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새로 얻은 깨달음은 따뜻한 가슴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께서 주시려는 무한한 자비를 느낄 수 있었고, 그 결과 자신들의 회개와 용서를 청하는 삶으로 변화된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가슴 보다는 머리로 살아가는데 더욱 익숙해진 것은 아닌지 신중하게 되돌아보면 어떨까?
우리가 바라는 보상은 우리의 노력과 결과로서 얻어지는 세상의 것과는 다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구체적인 응답이 필요하지만 우리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주님께 청하는 내용이나 살아가는 기준이 어떤 것에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진정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며,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 우리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타인의 글을 익혀 사용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진정 세상을 느끼고 사람들을 품에 안을 수 있는 가슴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자비와 사랑을 알고 그분께 늘 용서를 청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 속에서 더 큰 기적을 스스로 간직하고 깨닫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였기에 늘 기적만 요구하는 사악한 세대라고 혹평을 당하는 이스라엘 군중들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살아가면서 생겨나는 많은 결점과 잘못들을 뉘우치는 모습을 가볍게 보시지 않는 분을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의 허물로 생겨난 부산물들을 뉘우치고, 새롭게 주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다짐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실생활에서 화해와 용서를 청하는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거나, 일치와 평화를 말하는 사람이 서로 갈라진다면 무엇으로 그것을 회복할 수 있으며 증거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이미 우리에게 충만하게 이루어진 하느님의 자비의 기적을 기뻐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하루가 되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