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22,30; 23,6-11 요한 17,20-26
아버지로부터 온 선물인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일의 결과를 보면서 그 책임을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긍정적인 것일 때는 문제가 없는데 부정적인 결과가 생겨났을 때의 반응이 누군가를 죽일 만큼의 인간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가정이 나쁘다.’ ‘정신적·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다.’ ‘고집이 남달랐다.’ ‘걸핏하면 화를 내고 싸웠다.’ ‘술을 많이 마셨다.’ ‘인상이 날카로웠다.’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평소 말이 없고 어두운 느낌이었다.’ 등등. 과연 이런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하겠지만, 이것이 그 사람의 평가 기준이 되어버린다면 우리는 이미 심판을 내린 것이고, 그를 죽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 속에서 바오로 사도와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의 모습과 상당히 다른 부분을 제시하고 있다.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대한 논쟁으로 인하여, 곧 그들이 지니고 있는 배경과 주장으로 인하여 서로 갈라져있을 뿐만 아니라 바오로 사도를 죽이려고 들고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는 동시에, 주님께서 바오로 사도에게 나타나시어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시는 장면을 바라보게 된다. 즉 어떤 처지에 있든 우리가 전해야 하는 진정한 내용은 주님의 부활로 이루어진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이다.
어쩌다 음식을 먹다가 누군가 나를 위해 식비를 지불하거나 다른 어떤 것들에 호의를 베풀게 되면 좋은 느낌을 갖게 된다. 물론 그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누군가의 존중감을 높이 평가해서 말해주는 칭찬은 그 대상의 모습을 극대화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임”을 분명하게 기도하고 계신다. 즉 우리 모두는 하느님으로부터 예수님께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이다. 왕 중의 왕이시고 주님이신 분께서 우리를 하늘로부터 보내진 선물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게 격려해주시고 우리를 겸손하게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마주하게 된다. 더욱이 이 기도의 모습이 당신이 곧 맞이하게 되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준비였고,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받아들이신 희생의 제사라는 것을 알고 계신 분께서 바치신 내용이라는 것에 우리의 현주소를 재확인해보게 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능력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사랑의 친교를 나누고 있듯이 우리도 완전히 그분과 하나 될 때 깨닫게 될 것이다. 비록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이런 친교를 이룰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남겨주신 사랑과 일치의 계명은 우리도 아버지로부터 온 선물인 동시에 지속적으로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와 하나 되기를 바라셨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이처럼 소중하게 창조되고,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고백하게 된 우리의 신앙을 기뻐하면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루가 되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