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ass 부활 제5주간 수요일(5월 5일)(본당 성모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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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상성당

      사도 15,1-6 요한 15,1-8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

       

      누군가 실제 생활에서의 자신의 걸림돌로 인하여 혼동과 불만족과 슬픔을 경험하게 된다면 자신의 삶을 살펴보고 도와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거나 삶을 충만하게 도와줄 손길을 찾게 된다. 여기에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충실한 삶의 봉헌으로 모든 것들을 남겨주셨음을 확인하는 날이 오늘이다.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당신의 교회를 마리아에게 주셨다. “이분이 너의 어머니시다.”(요한 19,27)

      엄마 없이 태어난 유일한 인간이 있다면 아담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 안에서 이루어진 실수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인류 구원을 위해 어머니를 주셨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도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4,4-5). 또한 예수님은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이로서 하느님의아들을 닮아, 언제까지나 사제로 남아 있습니다.”(히브 7,3)라고 말하는 멜키체덱의 사제직의 모습처럼 나타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육화의 모습으로 어머니에게 주셨을까?

      이것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마리아에 대한 그의 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녀의 모성과 신적인 부성 사이에서 특별한 친교로 주어진 것이다.”(Theotokos: Mary, Mother of God). 이로써 마리아의 모성은 성찬례와 연결되는 아버지의 선물이 되었다. 마리아의 모성은 우리가 주님의 모습을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전형이 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그의 아들에게 어머니를 주셨다. 그러기에 하느님에 대한 여러 가지 한계들(추상적이고, 멀게 느껴지며, 냉혹하고, 알기 어렵고, 비교할 수 없는)이 어머니 안에서 극복되게 된 것이다. 이 의미는 마리아의 모성에 관한 신학을 통하여 더욱 풍성하고 복합적인 의미가 신앙인들의 경험 속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 되었을 때 엄마를 찾는 것과 같이,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 조차 엄마를 찾는 것이다. (라틴 말에서 유래한 mater; mother는 ‘matter’라는 단어에 그 어원을 둔다.) 그래서 성모송을 바칠 때 우리를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당신의 아들 예수님께서 겸손의 자세로 십자가의 뜻을 받아들이실 때 제자들에게 어머니를 그리고 어머니에게 제자를 알려주셨다. 그 이후 어머니를 집에 모셨다고 전해주고 있다.(요한 19,26-27).

      사실 우리 혼자서는 온전한 우리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누가 우리의 부모님이 되어야할지를 첫 번째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과 그의 부모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자라면서 나 자신이 자신답게 자라기 위해서는 누군가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베네딕도 16세 교황이 되기 전의 요셉 라찡거 추기경은 말한 적 있다. “그 자체로 우리자신이라는 표현은 있을 수 없다. 우리라는 표현은 우선 또 다른 나를 받아들여야 가능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려면 먼저 누군가로부터 사랑 받아야 가능하다. 엄마가 되어 산다는 것은 그녀가 육체적으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이가 눈물을 흘릴 때나 웃음을 지을 때나 자신의 전체를 주어야 한다. 이것을 서로의 받아들임에서 이루어지는 삶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창조물은 단순히 육체적인 탄생이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서 존중을 필요로 하는 독특한 창조물이다. 만약 개별적인 것이 그 자신에게 받아들여지려면 누군가로부터 그는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다. ‘네가 있어서 좋다.’는 말로써가 아니라 사랑의 행위로써 전해져야 한다. 이런 사랑의 길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타인의 존재와 동시에 누군가로 전해질 때 가능해진다.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열쇠는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Principles of Catholic Theology, pp. 79-80)

      어머니 마리아의 교회에 대한 모델은 우리들의 삶의 모습 속에도 적용된다. 결국 우리도 마리아의 모성을 우리 각자의 집에 모시며 살아갈 때 그 선물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런 신비로운 관계에 대한 이해를 위해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의 글을 인용해본다.

      “복된 성모님을 바라보며 나는 그녀에 대한 나의 단순한 길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어머니에게 말을 할 때마다 나 스스로 놀랍다. ‘그러나 선하신 복된 동정녀시여, 나는 당신보다 더욱 복됨을 발견합니다. 나는 당신을 어머니로 모시고 있으나 당신은 사랑하기 위해서 복된 동정녀가 되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어머니셨지만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당신을 어머니로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과 당신을 우리의 소유로 갖는 동안 나는 당신보다 더 부자입니다.”(General Correspondence).

      우리 자신의 처지에서 볼 때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직접 모실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어머니의 순수함과 모성적 묵상을 통하여 하느님의 어린이들처럼 순수하게 되어야 한다. 어머니의 중재로 우리의 추락된 모습들이 다시 회복되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을 바라봐야 한다. 우리가 어머니 마리아를 공경하며 그분께 기도를 청하는 것은 이런 사랑의 모성과 부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모델이기 때문이며, 그분의 전구를 통하여 우리도 힘을 얻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는 모든 것에서 우리를 옮겨주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신다. 그래서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는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전체를 성화하기 위해 봉헌하고,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어머니의 중개를 통하여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가 드려야 하는 영광과 감사를 받으시도록 도와주시는 복되신 동정녀시다.”(True Devotion)

      이제 우리의 어머니를 바라보는 나 자신의 신앙을 재확인하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젖을 먹고 힘을 얻는 시간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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