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5,17-26 요한 3,16-21
주님을 드러내는 우리의 말과 행동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데카르트가 말했듯이 ‘지속적인 창조’의 세계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 곧바로 손을 때신 것이 아니라 매순간 계속하여 그 세계를 창조하고 있으며 그 창조의 숨결이 없다면 우리의 세상은 무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 창조의 숨결로 세계는 끊임없이 존재의 목적으로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생명의 움직임은 가둘 수도 없고, 갇혀 있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오늘 이 복음의 생명력이 사도들을 통하여 증거 되고 있다. 그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대사제와 사두가이파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넘어선 제자들의 복음 선포를 목격하게 된다. 그들이 사도들을 감옥에 가둔 이유는 시기심에 가득 찼기 때문이다. 예수님만 없애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더욱더 많은 기적들과 자신들의 행위를 찌르는 상황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자신들에게서 떨어져나갔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산헤드린의 최고 위원이며 바리사이였던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되는 것이다. 바로 하느님께서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신 이유는 심판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임을 말씀해주신다. 그리고 아들을 믿는 사람들을 심판을 받지 않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들은 빛과 진리와 영원한 생명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니고데모에게는 놀라운 소식이며 혼란스러운 소식이었다. 그 자신도 이미 빛 속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지만, 예수님의 빛은 그가 알고 있던 빛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보내주신 것 가체가 진리와 완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새로운 창조물이 되었고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되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빛과 진리를 누리며 나눌 수 있게 될 것임을 갱신하였다.
이제 우리의 생활의 모습으로 돌아와 생각해보자.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을 저녁 기도 시간에 돌아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주님을 간직하고 전하면서 살아갔는지를 돌아보는 것이다. 우리의 기준이 예수님의 것에서 벗어나 있다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창조되거나 빛과 진리를 추구하지 못하는 어둠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내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를 특별하게 원한다면 내가 그런 모습을 살아가야 한다는 간단한 진리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희생이 필요하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필요하다. 여기에 관대함과 따듯함과 사랑과 겸손이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결과를 바란다면 과정으로써의 오늘의 삶 속에서 주님을 증거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