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기도와 쪽지 수행
우리는 앞에서 수도승 전통 안에서의 묵상이라는 되새김 수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살펴보았다. 이것은 단순히 성경의 어떤 구절을 반복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반추동물이 삼킨 음식물을 토출, 재저작, 재혼합, 그리고 재연하 하여 완전히 자신의 살과 피가 되게 하는 일련의 과정처럼 묵상에 속하는 반추기도는 하느님 말씀을 되뇜, 혹은 암송을 통해서 온전히 나의 것이 되게 만드는 독특한 수행이다.
반추동물이 음식물을 섭취할 때 일단 그것을 삼켜서 제1 위(胃)에 저장하였다가 그것을 다시 토출하여 되새김하듯이, 우리 역시 하루 중 아침의 적당한 시간에 성경 독서를 하면서 특별히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있으면, 그것을 기억하거나 쪽지에 일단 기록해서 간직해 둘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의 기억이나 쪽지는 반추동물의 제1 위와 같은 기능을 한다. 그러나 현대의 바쁜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씀을 기억 속에 간직했다가 그것을 정확하게 기억해 내기란 참으로 어려울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응답해야 할 많은 일과 바쁜 일정 속에 늘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때는 성경 독서를 하고 말씀을 분명히 기억 속에 간직하였지만, 일상에서 떠올리려고 하면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기억이란 100% 신뢰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말씀 쪽지 수행을 하도록 특별히 권고하고 싶다. 매일 성경 독서를 하고 끝마칠 때는 그 말씀들 가운데 하루의 영적 양식으로 삼을 한 말씀을 쪽지에 적고, 일상에서 동행한다. 그리고 언제든지 시간이 날 때, 일터에서나 휴식 시간에 혹은 홀로 산책할 때 쪽지에서 그 말씀을 떠올리고 천천히 되새김할 수 있다. 또한 저녁의 적당한 묵상 시간에 그 구절을 천천히 호흡에 맞추어 집중적으로 반추해 볼 수도 있다. 이렇게 하느님 말씀을 기억이나 쪽지를 통해 떠올리고, 일상에서 끊임없이 되뇌는 수행을 하다 보면, 어느 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깊이 스며들게 된다. 그리고 그 말씀은 죽어있는 문자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새로운 메시지임을 깊이 깨닫게 된다.
결론
교회는 언제나 성전(聖傳)과 동시에 성경을 신앙의 최고규범으로 늘 간직하여 왔다. 그러므로 일상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라갈 수가 없다. 이제 다시 성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매일 가까이하고, 성경을 읽고 맛 들일 때 비로소 성경 말씀은 우리 안에서 살아 현존하게 된다. 이에 수도승 전통에 근거한 성경에 대한 능동적인 독서와 반추기도의 항구한 수행은 하느님 말씀의 풍요로움 그 자체로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의 영성 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것이다.
오랫동안 연재해 온 수도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성독)는 이 지면을 끝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동안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허성준 가브리엘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출처 : 인천교구주보)